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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50:11~20   용서를 위한 심판    2015. 3. 4

11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타작하는 송아지 같이 발굽을 구르며 군마 같이 우는도다,,,,,,,,,,, 1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지난주에 멸망할 바벨론에서 도망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옛날 그 바벨론은 이미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신약의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의 바벨론이란 그 당시 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말하고 이 로마는 곧 온 세상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무너진 것은 온 세상이 무너진 것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때에 나타난 교만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은 이스라엘에도 있고 바벨론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8:1~2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바벨론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지 않고 무너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이미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무너질 것도 이미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무너지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도 얼마든지 살만한 세상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베드로후서 3:1~4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자기의 정욕을 따라 조롱하는데 주의 강림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사도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3:5~7절입니다.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 둘 째 날에 물과 물을 나누어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 물이 한 곳으로 모이도 뭍이 드러나게 합니다.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물을 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6일 째 이 뭍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처음에 물속에 있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사도가 주의 강림이 없다는 자들에 대하여 이 땅이 처음 물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이 물에서 나온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말씀을 무시하면서 삽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심판하신 것이 노아 홍수입니다. 그러므로 노아홍수를 통하여 이 땅이 물에서 나온 것임을 다시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동일한 말씀, 곧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며 노아 때에 홍수로 심판하신 그 말씀대로 지금 이 하늘과 땅을 보존하시는 이유는 경건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지만물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무시하면서 사는 자들을 위하여 지금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을 불사르시는데 어떤 자들을 함께 불사르시는 것입니까?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란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고 그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는데도 그 말씀을 무시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말씀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에 증거 되는 것이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0~32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롱하고 어떤 사람은 더 듣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시대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 날을 작정하시고 그 증거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합니다. 이것이 심판과 구원의 소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기 전에 이렇게 서론이 긴 것은 구약의 말씀들을 신약의 완성으로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바벨론의 심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심판이며 그런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노아 홍수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노아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장차 나타날 이 세상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계시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의 심판이 일어납니다. 그 마지막 열 재앙에서 장자가 죽어갈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살아남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그 당시의 심판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온 세상의 심판도 미리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가나안 일곡 족속을 심판하는 내용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 아래 있지 않음이 이미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어린 양의 피 아래 머물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이스라엘이 북은 앗수르에 심판을 당하고 남은 바벨론에 심판을 당합니다. 이러한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앗수르도 바벨론도 다시 심판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를 통하여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심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용서를 위한 심판입니다. 물론 이러한 용서에 해당되는 심판을 받는 자들이 약속의 백성들입니다. 

오늘본문 예레미야 50:11~13절입니다. “11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타작하는 송아지 같이 발굽을 구르며 군마 같이 우는도다 12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13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주민이 없어 완전히 황무지가 될 것이라 바벨론을 지나가는 자마다 그 모든 재난에 놀라며 탄식하리로다” 

바벨론이 얼마나 완전한 심판을 당하는 그곳을 지나는 자마다 그 재난에 놀라며 탄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판은 하나님의 소유를 노략하면서 즐거워하며 기뻐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작하는 송아지처럼 발굽을 구르며 군마 같이 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신다고 지금까지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를 노략한다고 이렇게 심판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심판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하여 오히려 자기들의 힘을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한 바벨탑을 쌓은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돌아오는 자가 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습니다. 실제 그 심판을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시 아버지가 죽었고 자기의 남편과 동서의 남편마저 죽는 것을 나오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룻은 그런 하나님을 믿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함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10:15~19절입니다.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앗수르의 교만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이 다 하나님의 손의 몽둥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몽둥이 주제에 자기가 주인인줄 알고 착각하게 된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나라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양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무찌른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도 자기들의 힘으로 무찌른 것처럼 자랑하였기에 앗수르가 망하는 것처럼 바벨론도 남 유다를 치면서 이런 교만함이 나옵니다(렘50:29). 이런 교만은 다음 주에 계속하여 보겠습니다만 오늘은 하나님의 심판을 하시는 이유는 그 심판 중에 하나님의 용서 받은 자들을 남기신다는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10:20~23절입니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남은 자가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심판을 통하여 돌아옵니다. 그 친자를 다시는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 일은 심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4~16절입니다. “14 바벨론을 둘러 대열을 벌이고 활을 당기는 모든 자여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쏘라 그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15 그 주위에서 고함을 지르리로다 그가 항복하였고 그 요새는 무너졌고 그 성벽은 허물어졌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내리시는 보복이라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는도다 16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 버리라 사람들이 그 압박하는 칼을 두려워하여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고향으로 도망하리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앗수르의 심판을 보았습니다만 바벨론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이렇게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앗수르와 같은 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본문 17~18절입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1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잘못하여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과 같이 되었는데 그 양을 노략하는 자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앗수르의 교만이 어떠함을 보았듯이 바벨론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산업인 이스라엘을 앗수르 왕이 먹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셀이 그 뼈를 꺾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다의 완전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 속에 하나님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나서 자기 백성을 용서 합니다. 

오늘본문 19~20절입니다. “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심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을 통하여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용서 받을 만 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여김을 받는 자들도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용서를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시는 것이 이러한 심판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으신 그 안에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찾을지라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죄를 찾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용서가 일어나는 현장은 심판의 자리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예언도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렘31:31~34, 렘33:1~9). 그러므로 새 언약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심판을 당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당하는 심판을 통하여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12:5~8절입니다.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심판을 통하여 용서를 알게 하시듯이 징계를 통하여 아들 됨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다른 방법으로 용서 받음과 아들 됨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도 잘 나고 힘 있는 자로 용서받은 증거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9:27절입니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오늘 설교에서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 중에 어떻게 용서가 일어나는지 보았습니다. 그렇게 용서를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과 유황에 불살라야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받을 그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심판 속에서 용서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런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자신이 왜 심판을 받아 마땅한지를 알게 됩니다. 성도는 날마다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왜 자신이 심판을 받아 마땅한지를 해석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이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을 주님께서 하여 주십니다. 주님께 해석을 당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신 십자가는 더욱 분명한 복음으로 들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