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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2:10~13 마지막을 기다리라 2015. 12. 16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 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오늘이 다니엘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서를 성문서로 분류하지만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는 예언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마지막만이 아니라 설교제목도 13절의 말씀대로 마지막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마지막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행복하지 않거나 극심한 어려움이 있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도 있지만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나 내 모습을 보면 도대체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이 끝이 나지 않고 이대로 계속된다면 이런 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마지막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광주에 갔다가 심야버스로 집에 와서 화요일 오전에 저의 집사람 외삼촌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장 발인 실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크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불교신자든 기독교신자이든 무교이든 모두가 그 귀천이라는 시를 보도록 발인식장 왼편에 세워두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칠 때에 돌아갈 곳이 어디입니까? 귀천(歸天)은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냥 고유명사로 사람의 죽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9:27). 2주 전에 땅의 티끌과 부활에서 보았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는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 마지막을 생각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까?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복입니까? 어느 마을에 죽음의 사자가 오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어떻게 죽음의 사자를 막을지 연구를 하였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아래 앉았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강력 접착제를 발라둔 것입니다. 드디어 죽음의 사자가 와서 그곳에 앉았는데 들어붙어서 마을에 들어오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죽지 않는다고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사람이 죽지를 않습니다. 사고가 나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도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그 죽음의 사자 엉덩이에 들어붙은 강력 접착제를 떼 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죽음이 없이 이 세상을 영원히 고정하고 불까지 붙여두면 이곳이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죽음을 기억하면서 사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죽음을 환영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구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다면 우리도 이 땅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몸을 떠난다는 것이 영육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있는 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의 특징은 이 땅에서 탄식하면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8:23).

 

그러므로 성도는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다니엘은 청소년 때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서 세 명의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동안 총리의 역할을 하였지만 그는 어떠한 부정이나 비리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몰락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 환상도 있고 바벨론 왕이 본 환상을 해석하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나라들이 아무리 강하고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라들은 짐승의 나라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 로마 제국들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는 뜨인 돌에 의하여 무너지고 부수어지는데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리고 그 돌은 태산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질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니엘이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해석한 것의 성취가 이미 이루어진지 약 2천년이 지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예언한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완료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환난과 성도의 핍박들이 역사 속에서 안티오코스 4세의 일로 추정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도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완성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은 구약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신 것이며 그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도 다 포함이 되는 이루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임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종말입니다. 더 이상의 계시의 발전이나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16~21절입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 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전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엘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그 예언은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라는 그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기에 지금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전적인 죄인임을 알게 되기에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종말의 현상입니다. 이 마지막의 특징을 요엘 선지자가 미리 내다보고 다니엘이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렇게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직 지혜 있는 자만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연단을 통하여 정결하고 희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이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로마서 5: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종말에 성령이 부어지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서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이 즐거운 것이 있습니까? 지금 즐겁다고 웃는 것들이 과연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즐거운 것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화평하며 은혜를 누리게 된 것으로 인하여 그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십니까? 그런데 성도는 후자의 은혜를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누리지만 이 땅에서는 환난과 연단이 필수코스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낳고 연단을 통하여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연단을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는 과정입니다.

 

요한계시록 22:10~11절입니다.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지난주에 봉함과 해제를 통하여 이미 인봉이 열려진 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열려져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여전히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봉이 해제된 자들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끝을 압니다. 끝의 특징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더럽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자는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 바울 이들의 공통점은 종말의 영이 임하여 이 세상이 분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십자가로 확증된 일이 이 역사 속에서 영원히 갈라서는 중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란 이 사실이 고착화되어 갑니다. 점점 분리되고 고착화 되어가서 결국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노선에 있습니까?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고착화 하여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연단을 받아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에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있습니까?

 

오늘본문 11~12절입니다.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이 부분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유다를 공격할 때에 제자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우상을 성전에 세웠다는 내용들을 보았습니다. 그때로부터 1290, 1355일을 기다리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날짜 계산을 존E. 골딩제어의 주석을 참고하여 보겠습니다.

 

다양한 역법이 선견자 시대에 사용되고 있었다. 바벨론은 354일을 한해로 여기는 음력을 사용했고, 엣센파는 364일을 한해로 여기는 양력을 사용했으며, 헬라 나라들은 360일의 해와 달 혼합 역법을 사용했다;: 각 경우에 역법은 윤달을 넣음으로써 양력의 참된 길이 365일 이상- 로 교정되었다. 모든 세 역법이 익숙했다는 증거는 논쟁의 주제였고, 날에 관한 다니엘의 시간은 이 논쟁의 반영으로 여겨졌다. 날에 관한 다니엘의 시간은 아주 정확하게 해와 달 혼합 역법에 적합하지만 그것을 다른 제도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윤달을 허용할 때 1290일은 31/2년의 음력 해나 31/2년의 양력 해를 나타낼 수 있다: 또한 1335일도 31/2 양력 해에 포함하는 것으로 추산 할 수 있다.’

 

이 주석을 참고로 하면 1290일이나 1335일이 다 한 때 두 때 반으로 말하는 삼년 반 곧 마흔 두 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기간은 다니엘에 예언한 환난의 시대로 본 안티오쿠스 4세 때의 환난의 때로 봐도 되지만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도 약 3년 반이 걸린 것입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약 5개월 만에 함락하지만 성이 무너질 때에 맛사다 요새로 피난 간 사람들이 약3년을 항전하다가 마지막 자살로 마무리되는 전쟁까지 보면 마흔 두 달의 기간이란 핍박의 시대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5절에서도 짐승에 의하여 핍박받는 기간을 마흔 두 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날짜를 이상하게 계산하여 대 환난과 예수님 오시는 날짜를 계산하면 그것은 다 엉터리 해석의 결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사도행전과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살펴본 대로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런 환난이 연단이 되는 것이며 그런 연단을 통하여 더욱 정결하고 희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됩니다. 여기서 정결하고 희게 된다는 말씀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와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도록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벌거벗겨 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로 자기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 그 옷을 말씀으로 벗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옷 입게 하시는 일이 성도에게는 연단인 것입니다.

 

오늘본문 13절입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 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다니엘의 사역이 끝이 남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미 세상의 끝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사역도 끝이 왔지만 세상의 끝도 이미 보았기에 평안히 쉬라고 합니다. 평안히 쉰다는 말을 표준 새 번역에서는 너는 죽겠지만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성도의 죽음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왕궁의 교육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모함을 받았으나 그러한 모함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전에 하던 대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일어나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의 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유지되고 있으며 결론 내려질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아직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우리의 인식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인식하지만 시간을 빼 버리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료된 세상입니다. 다니엘이 세상의 끝을 안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세상의 끝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의 영이 임한 우리는 다니엘 보다 더 담대하게 이 세상을 가볍게 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엇을 바라본 것인지 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에게 임한 그 은혜 곧 구원을 살펴보았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연구하고 부지런지 살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소식을 전한 다니엘에게 주님은 이제 네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 네 몫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 받을 몫이 무엇입니까? 쉼과 받을 몫에 대하여 봅니다.

 

히브리서 4:1~3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창조할 때부터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구약의 백성들에게 없었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때에 온전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다윗은 다시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9~13절을 봅니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 때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다니엘처럼 안식합니다. 이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없기에 자고 일어나는 것이 순간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순간이기에 우리보다 순서적으로 앞서겠지만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있는 우리도 홀연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니엘이 들어간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떤 목사님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신 말씀을 원어로 풀면서 죽음이 당겨지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즉 죽기 위하여 힘을 쓰는 자를 보셨습니까? 살기 위하여 힘을 쓰지만 죽기 위하여 즉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힘을 쓰는 자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어떻게 이루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벌거벗기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판단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지금 노출되어지는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고 속히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얻는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으로 벌거벗겨 지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게 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맛보기에 그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더욱 힘을 쓰게 됩니다. 그 완전한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의 부활도 함께 참여되는 것입니다. 묵시 적으로 이미 성도는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힌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몸으로 이 시간과 공간 안에 허덕거리며 살기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위로와 기쁨의 말씀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그 분을 우리의 몫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