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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1-17 에스겔의 상징행위 2011. 12. 7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 내가 그들의 범죄 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7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14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을 떡을 구울지니라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먹고서 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 벙어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열게 하실 때에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벙어리가 되어 꾸짖지 아니하면 이것은 완전한 심판입니다. 파수꾼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꾸짖지 아니한다는 것은 돌이킬 기회가 없고 이제는 심판만 집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서 말은 하지 못하지만 행동으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무언극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 보다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요한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서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에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물을 때에 서판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쓰니 그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요한이 보통 아이가 아님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말없이 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 년이 넘는 기간을 무언극만 하고 있습니다. 그 무언극은 4:1-5:4절까지 계속됩니다. 무언극이 끝나고 그 상징행위의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4장 안에서 에스겔의 상징행위만 살펴보겠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상징적인 행위를 하지만 그 뜻은 유다백성이라면 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징행위로도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겠습니다.

 

4:1-3절입니다.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토판에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라고 합니다. 토판이 굽기 전의 토판이라면 부드럽게 그려질 것이고 구운 토판이라면 조각도 같은 것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토판의 그림들이 최근에도 바벨론지역의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왕들이 조공을 받는다든지 적을 정복한 내용들을 그림과 글로 새겨둔 것들입니다. 이런 토판에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지도를 그리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과 주택과 길들이 표시되면 알아봅니다. 그 성읍을 그린 토판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흙으로 에워싸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다리를 세우고 공성퇴를 둘러 세웁니다. 이런 모양은 옛날에 성을 공격하는 방법들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가 되고 공격을 받는 모습입니다.

 

3절을 봅니다. 이렇게 성읍이 포위되어 공격받는 모양을 만들어놓고서 다시 철판을 가져와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징조가 되리라고 합니다. 무슨 징조입니까? 예루살렘의 성읍이 포위되고 공격된다는 징조이지만 더 심각한 징조가 철판으로 막아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1인 2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도 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적으로 공격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적이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을 보여주시는 상징인 철판으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가로 놓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적이 쳐들어와서 성읍이 망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갈라놓고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성읍이 이스라엘의 역할인데 그 사이에 철판을 세워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고 막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직장은? 은퇴 후의 대책은? 사업은? 경제상황은? 교회의 운영은? 이런 두려움들보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더 두렵게 여겨지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철판에 막힌 것입니다.

 

4:4-8절입니다. 또 다른 상징행위가 나옵니다.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게 눕는 날 수 대로 그 죄악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왼쪽으로 누워서 390일, 오른 쪽으로 40일을 담당하는데 하루가 일 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얼굴을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여 팔을 걷어 올리라고 합니다. 심판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로 몸을 묶어서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 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행위를 1년을 넘게 하여야 합니다. 에스겔도 힘이 들겠지만 그의 아내도 이런 남편을 볼 때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보시면 아내가 먼저 죽습니다. 아내가 죽어도 울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징행위는 죄악을 담당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대속이냐 아니면 유대인들의 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대부분 대속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대속의 역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처럼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이며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있는 것처럼 이사야 53장에서도 그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두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고 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이 벌을 받는 것과 대속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포로로 잡혀오는 것은 죄악에 대하여 벌을 받는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소망이 있고 그 과정이 대속의 과정이 됩니다.

 

그러면 왼쪽으로 누워 390일을 말하는 것은 390년의 죄악을 담당하는데 에스겔로부터 소급하여 올라가면 솔로몬의 성전 완공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의 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이스라엘은 곧 우상숭배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오기 까지 늘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임을 고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40일은 아직 남은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간이 포한되는 40년으로 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430년과 같은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이러한 상징행위는 심판과 동시에 대속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4:9-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는 그 날수동안 먹을 양식과 마실 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섯 가지 혼합곡물로 떡을 만들어 옆으로 눕는 날수대로 먹는데 그 양이 이십 세겔과 물은 육분의 일 힌입니다. 이것은 한 끼의 식사분량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굶어죽지 아니할 정도의 양만을 저울에 달아서 먹어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다는 것은 성위 포위되거나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음식이 핍절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행위입니다. 그리고 떡을 구워먹되 인분에 구워먹으라고 합니다. 인분은 성경에서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인분으로 떡을 구워먹으면 부정하게 되기에 에스겔이 자신은 자기 영혼을 더럽힌 적이 없다고 합니다.

 

14절을 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결규례를 지켜왔다고 합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이런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이 정도로 모든 유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그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뢰하여야 할 여호와 하나님은 의뢰하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의뢰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식으로 말하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러므로 16-17절을 보시면 그 양식을 끊어버리니 저울에 달아서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마시며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 쇠패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언약의 저주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봅니다. 1-13절까지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14-46절에서는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가 레위기 26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면 재앙을 내린다고 합니다. 파종한 것을 대적이 먹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대로 청종하지 아니하면 7배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18-23절에서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이 된다는 말씀은 기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고가 헛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다시 일곱 배가 더 재앙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들짐승을 보내어 자녀를 움키고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인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들짐승은 세상의 성공이라는 들짐승이 우리의 자녀를 삼키고 있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다시 7배의 재앙을 더하십니다. 결국 최종적인 재앙이 일어난 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입니다.

 

26절입니다.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양식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 상징행위를 통하여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그들에게 레위기 26장의 말씀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하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심한 재앙이 쏟아지는데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은 오히려 안식을 하게 됩니다.

 

40-46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대항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항하여 그들이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을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누가 기쁘게 그 형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많이 잘못하였다고 이렇게 재앙을 받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순순히 포로로 잡혀가서 재앙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이들이 순순히 형벌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에스겔이 대표로 여호와의 벌을 받습니다. 390일을 모로 누워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40일을 또다시 모로 누워서 유다의 죄악을 담당합니다. 에스겔이 기쁨으로 그 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이기에, 여호와의 영에 의하여 세움을 입었기에 자신은 그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담당하는 일에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지금 주의 영에 의하여 죄를 담당하는 에스겔은 이것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기쁘게 받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으로만 됩니다.

 

그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면 아주 멸하지 아니하면 그들과 맺은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바벨론이며 유배지입니다. 이곳에서 살며 고생하는 것이 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기쁨으로 이런 환난을 맞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홀로 이 저주와 재앙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십자가에서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성령을 받은 자는 놀랍게도 세상의 환난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야고보서 1:1-4절입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자신이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이 있으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땅이 바벨론이라는 유배지이기에 예수 믿고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세상의 힘을 믿지 않고 살려고 하면 집안에서 먼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려고 하면 교회에서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기쁨으로 견뎌내라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에스겔이 상징행위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었듯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상징행위가 됩니다. 믿음으로 오는 환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