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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15~22 라헬의 통곡과 소망 2014. 6. 18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월드컵에 세월호가 묻혀버렸지만 두 달이 넘은 지금까지 실종자가 학생 6명, 교사 2명, 승무원 1명, 일반인 3명이라고 합니다. 실종자의 가족들은 시신이나마 빨리 수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와 가족들에 대한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도 자식을 잃어버리고 통곡하는 라헬의 애곡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라마의 통곡소리와 라헬의 애곡에 여호와께서 울음소리를 멈추라고 하시면서 소망을 주십니다. 그 통곡과 애곡에 대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이 나오면 잠잠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워낙 개인주의가 강해서 어른들이 말씀하셔도 듣는 자들이 없습니다. 집안의 어른이 기침만 해도 조용했던 시절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라 정당한 권위조차 사라져버린 시대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이 말하면 잠잠히 귀를 기울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힘 있는 자의 소리라도 우습게 들려야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들어야 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한다고 합니다.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선 라마와 라헬의 통곡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마 근처에 라헬의 묘실이 있습니다(삼상 10:2).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기와 질투를 하였는지 자신의 첩을 야곱에게 주어 자녀를 낳게 하였습니다. 결국은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창세기 35:16~20절입니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라헬이 자녀가 없어서 시기 질투를 하다가 두 아이를 낳았지만 베냐민을 낳을 때에 난산으로 죽습니다. 죽어가는 고통 속에 아들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원하였지만 자녀로 인하여 죽어갈 때에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라마와 라헬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마치 세월 호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느끼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라헬을 18절에서는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에브라임은 라헬의 자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에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에게서 오른 손의 축복을 받은 자가 에브라임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가 에브라임이기기에 북 이스라엘을 부를 때에 에브라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 라헬을 18절에서는 에브라임으로 21절에서는 처녀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였는데 다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금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라헬의 통곡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통곡하는 장면과 중첩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갈 때에 누가 포로로 잡혀갑니까? 젊고 기술이 있는 자들을 잡아갑니다. 그러면 눈앞에서 자기의 자녀들이 잡혀가는 것을 불 때에 무엇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일제 강점기 때에 강제징용을 당하여 전쟁터로 위안부로 끌려가는 자기의 자녀들을 보면서 통곡하고 애곡하는 그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라헬이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남 유다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라고 합니다.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은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들이 자녀가 포로로 끌려가는 그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울음과 눈물을 멈추라고 합니다. 네 일에 삯을 받았다는 말은 그들이 주님께 회개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나 원망이 심하여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네 삯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란 우상숭배만 하다가 자녀가 잡혀가니 통곡하고 애곡한 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에게서 빼앗긴 자녀들이 돌아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하심과 그의 긍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의 소망입니다.


18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 합니다. 라헬의 다른 이름이 에브라임임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 탄식은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15절에서 라헬의 통곡과 애곡은 자식이 없어졌기 때문인데 이때는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탄식하는데 그 탄식은 여호와의 징계로 인한 것임을 아는 탄식입니다. 이때 간구가 나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스스로 돌이킬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은 주의 징계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가서 완전히 절망하였기에 나옵니다. 이런 상태에서 돌아왔다면 누가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까? 주께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는 장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 앞에 나오는 양 백 마리 가운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목자가 찾습니다. 열개의 데나리온 중 잃어버린 하나를 찾을 때 까지 찾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양이며 드라크마입니다. 그렇다면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창녀와 다 말아먹고 나서 어떻게 스스로 돌아옵니까? 그 나라가 흉년이 들어 돼지 치는 일을 하지만 돼지가 먹는 것으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였을 때에 스스로 돌이킵니다.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은 아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아들을 망하게 하시고 그 나라도 흉년이 들게 하셨기에 돌이킵니다. 이렇게 돌이켜 돌아오는 자의 모습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아들의 자격이 없음을 알고 돌아옵니다. 아들의 자격이 전혀 없음을 알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들로 맞아주십니다. 이 소식에 화가 난 큰 아들이 정말 잃어버린 자가 됩니다. 오늘도 주께로 돌아온 자들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돌이켜 주셨기에 돌아왔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지난주에 의하면 맹인과 다리는 저는 자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입니다.


오늘본문 19~20절입니다. 내가 돌이킨 후에, 스스로 돌이킨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돌이킨 자들은 그제야 뉘우쳤고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다고 합니다. 주께서 돌이키신 후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금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돌이키도록 주님께서 에브라임을 어떻게 징계하셨는지가 20절에 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를 책망할 때 마다 깊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징계를 하시는데 주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 기울이십니다. 그 표현을 창자가 들끓는다고 합니다. 애간장이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긍휼입니다.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그 긍휼을 베푸신다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처음에는 라헬에서 에브라임으로 이제 처녀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처녀 이스라엘을 ‘너’라고 부르면서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든 길을 마음에 두라고 하면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는데 어디로 돌아오는가 하면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오는 길에서도 방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반역한 딸아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는데 그 새 일이란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라헬, 에브라임, 처녀 이스라엘, 반역한 딸이라고 부르시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들의 특징은 통곡하며 애곡한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자녀를 잃어버림으로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서 자기들의 자녀들이 빼앗기는 현실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때에는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데 그 소망이란 그렇게 울면서 포로로 잡혀간 자리에서 주의 징계를 깨닫고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게 됩니다. 이렇게 뉘우치는 것도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대로 반역한 그들이 돌아오게 하시는 일이 새 일입니다. 이 새 일은 여자가 남자를 않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라헬의 통곡과 새 일이 무엇인지 신약에서 연결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6~18절입니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예레미야 31:15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의 이루어짐을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유아를 살해한 장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15절입니다.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동방박사들이 왕이 태어난 징조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의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으로 태어난 자를 찾았을 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으니 정확하게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헤롯이 박사들을 보내면서 왕을 찾으면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경배하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이려고 합니다. 왕궁을 나서자 다시 별이 인도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후에 천사의 지시를 따라 다른 곳으로 박사들이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고 하기에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호11:1).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것은 지금 예루살렘이 애굽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합니다. 물론 애굽도 말 그대로 애굽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지금의 예루살렘이나 모두가 다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곳에서 불러내셔서 주께로 돌이키시는 그 새 일이란 결국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고 합니다. 전에 번역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돌아오거나 그 살아남은 자들에게 여러 여인들이 둘러써서 자기들의 울타리가 되어 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3:16~26절입니다. “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 반지와 코 고리와 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23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 25 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 시온의 딸 곧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으로 인하여 남자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 버렸으니 대를 이을 남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절입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 전쟁으로 남자들이 죽고 남은 남자들은 포로로 끌려갔으니 대를 이을 남자가 없습니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합니다. 일곱 여자는 완전한 수를 말하기에 모든 여자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여자들이 바로 앞에서 온갖 사치와 우상숭배를 일삼든 예루살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자기 떡을 먹으며 자기 옷을 입으리니 단지 이름만 넘겨 달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씨만 넘겨달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로 망한 나라에 새일 이 무엇이겠습니까? 여자가 남자를 안는 일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놓고 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사야 4:2~6절입니다. “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5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6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죄로 인하여 심판을 당하여 남자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남자를 둘러싸게 되는 일이 일어나면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면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시고 주께서 그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라마에서 통곡, 라헬의 애곡, 에브라임의 탄식, 처녀 이스라엘, 배역한 딸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주께서 징계를 받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시고 나라가 망하도록 하십니다. 그 망한 자리에게 주께서 애끓은 긍휼로 그들을 돌이키십니다. 그렇게 돌이켜 주실 때에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새 일입니다. 이러한 새 일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과 이사야서를 함께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이 새 일인 결국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으로 연결이 됩니다.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자기 백성들의 구속하셔서 그들의 남편이 되어주십니다. 구속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누가복음 2:25~33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이것이 여호와의 새 일입니다.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탄식과 애곡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그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음으로 참된 쉼을 맛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