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열왕기상 17:17-24 엘리야의 기도(1) 2010. 5. 5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오늘이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날이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하여도 어린이들은 천대꾸러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왕자와 공주처럼 길러집니다. 그러니 자기들만 아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내 아이만 잘 되기를 바라고 내 가정만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 나선 삶이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17절을 보시면 집 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위중하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이 집주인은 과부입니다. 다른 아들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자식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자식의 죽음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에게 왔기에 자기 죄를 생각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인하여 자기 죄를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만 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무언가 덕을 보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잘 대접하고 모셨는데 자기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러면 당장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원망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내 아들을 죽게 하였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회개하여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이방 여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아합과 이세벨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진 것은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남쪽은 두 지파로 북쪽은 10지파로 나뉘어 졌습니다. 북 이스라엘 초대왕은 여로보암입니다.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다윗처럼 행하면 왕위가 오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보암이 왕이 되자말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 유다에 있는 성전으로 제사하려 가면 민심이 이반될 것을 염려하여 북쪽의 단과 벧엘에 신전을 만들고 금송아지를 세워서 하나님이라고 경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출발부터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그 하나님이 금송아지 우상인 것입니다. 아합 시대는 그 우상숭배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시돈사람 엣바알의 딸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의 딸이기에 그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바알을 위하여 신전을 지은 것입니다(16:29-33).

 

바알의 뜻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알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참된 주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 바알이 가나안의 기후를 주장한다고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비와 이슬이 제때에 와야 농사가 되는 곳이니 인간의 본성으로 이런 신을 섬기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되어있었습니다. 오늘 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바알을 섬기는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지 구별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17:1절을 봅니다. 갑자기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의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의 하나님이 가득한 이스라엘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가 아합에게 선포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서 말하는 것이기에 여호와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알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왕입니다. 기후를 주장하는 바알을 섬기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바알이 가짜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모든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늘이 놋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비가 잘 온다면 그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선포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2-7절을 봅니다.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합니다. 왜 숨어야 합니까? 아합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냇가에서 숨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먹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그릿시냇가로 가 있으니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가뭄에 까마귀가 어떻게 떡과 고기를 물고 왔겠습니까?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내는 곳의 제물을 물어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새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부정한 새로 분류된 까마귀가 물어오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거룩함과 부정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고정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미 우상숭배로 더렵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거룩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하다는 그들은 부정한 자가 되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는 오히려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죄인이라서 감히 하늘을 향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는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행전 11장에서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네 귀퉁이를 묶은 보자기에 싸여 내려오는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면서 이방인에게 가게 만드십니다.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까마귀 한 마리로 이렇게 까지 보는 것은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씀을 봅시다.

 

8-16절입니다. 7절에서 비가 오지 않으니 그릿시냇가가 마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엘리야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고 합니다.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겠다고 합니다. 부정한 짐승인 까마귀의 공궤를 받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라는 엘리야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의 한 과부에게 공궤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사역이 누구를 보여주고자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들과 접촉하시고 이방인 과부의 딸을 고쳐 주시는 모든 모습을 엘리야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물을 좀 가져오라고 합니다. 물을 떠 오려고 가는 여인에게 떡도 하나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빵을 만들어먹고 아들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떻게 엘리야의 하나님을 알았는지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소문을 들었든지 아니면 엘리야가 말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13절을 봅니다. 엘리야가 그런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두려워말고 먼저 그것을 나를 위하여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복입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흉년에 겨우 목숨을 유지한 것입니다. 굶어죽는 것 보다 복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뭄에서 살아남는 정도의 복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4:25-26절입니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 말씀은 단지 이 여인이 흉년에 살아남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를 통하여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흉년은 계속되고 있는데 이 과부의 가루통과 기름병에는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를 대접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병이 들어 죽어버린 것입니다. 차라리 흉년에 자신과 아들이 함께 굶어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자기는 살아있고 양식도 있는데 아들이 병들어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18절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을 데리고 다락 자기 방에 올라가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그 아들을 죽게 하였느냐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혼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 과부는 엘리야를 향하여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에 접촉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온 몸으로 세 번이나 아이 위에 엎드린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까마귀도 부정한 짐승이며, 이방인도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과 접촉하지 않아야 하고 이방인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위반하도록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그렇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보다 더 심각한 죽은 시체에 온 몸으로 세 번이나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 부정함에 참여하여 여호와께 기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7:11-17절입니다. “봉독”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는데 주께서 그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관에 넣고 못을 박는 것이 아닙니다. 베로 감아 들것에 들고 가니 시신이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시신에 손이 닿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정을 자신이 입으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동인은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우리도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부정한 자요 더러운 자들입니다. 이런 부정함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시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여 자기 백성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일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희생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