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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4:1~23 그 언약을 눈여겨보소서!   2021. 10. 27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 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 2)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8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 그 언약을 눈여겨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 학대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표제어가 아삽의 1)마스길입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입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1)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2)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감동과 교육은 영감과 징계로도 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징계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징계하시는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적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며칠 전에 어찌하여 정하였는데 전에 이 제목으로 설교한 기억이 있어서 찾아보니 시편 43편을 설교할 때 이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때의 내용 일부분 인용하고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한글 성경에서 339회 나옵니다. 구약에서 235회 신약에서 104회가 나옵니다. 우리는 언제 어찌하여라는 말이 나옵니까?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사태가 이해가 안 될 때 나오는 말입니다. 나의 상식과 경험과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나오는 말이 어찌하여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어찌하여라는 단어를 최초로 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 부끄럽고 두려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그 그늘에 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시니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자기에게 줘서 먹었다고 하면서 책임을 넘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이렇게 하였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최초로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질문에 여자는 뱀이 유혹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고 뱀은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어찌하여라는 질문에 우리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은 핑계를 댑니다.

 

욥기 42:1~6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그동안 어찌하여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답변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데 욥은 그동안 어찌하여이런 일어나느냐고 한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욥처럼 경건하게 악에서 떠나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살았습니까? 욥에 비하면 우리는 새 발의 피도 안되는 삶을 살아놓고서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따집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찌하여를 곰곰이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은 모두가 원망의 말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항변이 어찌하여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를 사용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이 어찌하여를 쓴다는 것은 만물보다 심히 타락한 인간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를 쓸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요일3:5, 4:15).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다윗이나 아삽이나 욥이 어찌하여를 말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를 최초로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의 처음 성경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를 자주 사용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우리는 자기 속에 들보를 보지 못하니 형제의 눈에 티만 보는 겁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십니다(8:26). ‘어찌하여이렇게 하느냐는 책망을 받을 때 회개하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의 선생인 서기관들이 속으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합니다(9:4).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또는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속으로 신성모독이라는 서기관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죄를 없애시는 일을 어떻게 이루어내십니까?

 

마태복음 27:46~54절입니다.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유일하게 정당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의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죄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새로운 살길이 열렸습니다(10:20).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의 버림받음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버림받은 우리에게로 버림받아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시고 짊어지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시는 일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는 그 부르짖음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성도인데 이 의미를 아는 과정은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낮추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의 버림받음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버림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식을 전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 복음의 선포를 믿는 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7개월 전 설교의 결론이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먼저 보았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봉독시편 74편의 내용이 어떤 역사적인 상황인지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표제어로 본다면 아삽의 시로 되어 있어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볼 수는 없기에 예언적 시로 보기도 합니다. 아삽이 선견자라는 내용을 지난주에 보았기에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본 자의 시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얼마나 심한지 영원히 버림받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느냐고 합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영원히 버림받은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처절하게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2~3절입니다. “봉독 이런 파멸의 상황에서 주님께 기억하시고 생각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한 주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속량이란 값을 주고 구하여 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회중과 주께서 계시던 시온을 생각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달라고 합니다. 성전을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합니다(99:5, 132:7). 예수님은 땅도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합니다(5:35). 주님의 발을 옮겨주시는 일은 주님의 함께 하심도 되지만 원수들을 발로 밟아 심판하시는 일도 되기에 그 발을 옮겨 달라고 합니다(110:1, 20:43).

 

4~11절입니다. “봉독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일이 바벨론에 의하여 일어납니다만 그 전에 이미 성전에 온갖 우상 숭배가 가득하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표적도 보이지 않고 선지자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래갈지 우리 중에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겠느냐고 하소연합니다. 11절에서도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여 달라고 합니다.

 

12~15절입니다. “봉독 1~11절까지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영원히 멸망 받은 모습이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영원히 버리시느냐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12절부터는 구원의 주님과 창조의 주님을 부르면서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부터 나의 왕이라고 하면서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 구원을 출애굽과 약속의 땅에 들어간 내용을 말합니다.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는 말씀은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혼돈과 교만의 세력을 바다로 말하지만 애굽도 그러한 세력이기에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리워야단은 바다의 괴물로 말하지만, 용으로 악어로도 번역하고 애굽의 바로 왕을 악어로도 말합니다.

 

에스겔 29:1~7절입니다. “봉독 오늘 본문 13~14절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있는 본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태에서 이 계시를 받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태인데 남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다시 애굽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애굽의 바로 왕은 한 마리 악어에 불과합니다. 한 마리 악어인 주제에 나일강을 내 것이라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는 그 바로 왕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악어를 잡아 사막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그 악어에 붙어사는 물고기 곧 애굽을 의지하는 나라들도 함께 멸망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세상의 힘이라는 애굽을 의지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기의 종교 행위를 믿었든지 세상의 어떤 것을 믿었든지 간에 그런 것이 무너짐으로 복음이 들렸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자기의 종교적 열심들이 내려지게 되자 십자가의 복음이 들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코로나 사태는 자기를 위한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몇 분이나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님과 창조의 주님은 바로 왕이든 바벨론 왕이든 코로나든 그 무엇이든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16~17절입니다. “봉독 13~15절은 구원의 주님께 간구합니다. 16~17절은 창조의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면 구원을 베풀어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일방적인 은혜 언약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께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창조의 주가 되시기에 그 구원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신뢰의 간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여도 나의 왕은 구원의 주님이시며 또한 창조의 주님이시기에 넉넉히 구원하신다는 신뢰입니다.

 

18~23절입니다. “봉독 구원의 주 창조의 주 여호와께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어리석은 백성의 주의 이름을 능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멧비둘기같이 연약한 주를 의지하는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간구의 근거는 그 언약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눈여겨봐 달라고 합니다. 땅의 어두운 곳에 포학한 자의 처소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학대받은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그 언약을 눈여겨봐달라고 합니다. 주의 대적들이 항거하며 떠드는 소리를 주께서 잊지 마시고 심판하여 달라는 내용도 그 언약을 눈여겨봐달라는 간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는 그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죽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그 언약의 완성임을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실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입은 자들도 그 십자가로 완성된 그 언약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지금 멧비둘기같이 외롭고 연약하고 궁핍하여도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서 안식과 자유를 맛보고 누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