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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9-18 한나의 기도 2010. 3. 17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오늘 볼 말씀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의 기도 그러면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기도하여 아이를 낳았기에 우리도 기도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도 아이를 낳을 수가 있고 또 다른 기도도 하면 응답을 한다는 식으로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나라는 이름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무엇을 기도하였는지 제대로 안다면 한나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 같으면 세상을 전복하려고 하는 불순사상자로 몰릴 것입니다.

 

우선 한나가 이런 기도를 하게 된 배경을 먼저 봅니다. 시대는 사사시대 말기입니다. 에브라임 지파 중에 엘가라는 사람에게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하여 브닌나라는 아내를 다시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런 소개 없이 아내가 둘이었다고 합니다. 이 가족이 매년 실로에 가서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실로에 언약궤가 있었기에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을 나눌 때에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는 것입니다. 한나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브닌나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도 못하는 여인을 사랑하여 제물을 배나 주고 자기는 자식을 낳아주었는데도 한나 보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한나를 격분시키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가졌기에 자식 없는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을 좀 너그럽게 보아주면 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독점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이런 마음은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6절에서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인데 이런 한나를 격분시키고 대적이 된 것은 결국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것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자신은 자식이 있다는 것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자녀 있음을 가지고 자녀 없는 한나를 대적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자기보다 한나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격분시키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녀를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하니 더 이상 소리도 나오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엘리 제사장이 보고 술 취한 여인이 중얼거리는 줄 알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영적인 지각이 이 정도의 형편입니다. 그때 한나가 여호와께 자기의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 제사장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제사장의 그 말을 듣고서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하는 빛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여호와 앞에 경배하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동침을 하였는데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이를 낳고 사무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무엘이라는 그림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젖을 뗀 후에 서원한대로 여호와의 집에 데리고 갑니다. 24-28절입니다. 예물을 가지고 성소에 나아가 엘리제사장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 곁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합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기도한 것을 허락하셨기에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려서 여호와를 경배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고서 한나가 기도하는 내용이 사무엘서 2:1-10절입니다.

 

2:1절을 봅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용은 찬양입니다. 그러니 한나의 기도라기보다 한나의 찬양이며 또 찬양이라기보다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무엇이냐 하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한나가 기도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던 여인이 대적 브닌나의 격분을 인하여 그 마음의 상함으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이 사건을 통하여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기에 기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기도입니까? 한나의 기도가 메시아에 대한 기도이며 예언입니까? 2:10절부터 봅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 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고 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런 메시아가 왕이 되어 땅 끝까지 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받는 자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시키고 대적인 된 것은 한나를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한나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한나가 기도하여 아들을 낳은 것은 메시아의 기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교만 하는 인간을 심판하는 기능이 메시아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주의 긍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기 있음을 자랑하면서 없는 자를 멸시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기의 무엇이 있음으로 인하여 교만하여 지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2:3절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만한 말을 입에서 내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기에 행동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브닌나의 교만과 오만 만이 아니지요! 모든 인간들이 다 교만하고 오만한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한지 모든 인간의 속성에는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사고방식이 태어나면서부터 내장되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만사가 불만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교만하고 오만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옳고 선하다고 여기는 행위들로 인한 것입니다. 브닌나의 경우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자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종 하갈이 임신하게 되자 주인 사라를 멸시한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갈과 이스마엘은 결국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겼기에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이방인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과 오만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다 자기 행동이 옳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이 잔치를 하다가 여흥에 취하여 예루살렘 성정에서 탈취하여온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그릇으로 술을 마셨을 때에 벽에 글씨가 쓰여졌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브라신입니다. 이 뜻은 왕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이며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가벼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메데와 바사제국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왕이 여호와 앞에 교만하였을 때에 그를 저울에 달아보니 가벼웠던 것입니다.

 

4-5절입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자의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용사입니다. 그런 용사의 활을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진 자는 교만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오히려 힘으로 띠를 띠는 것입니다. 풍족하던 자들이 교만하겠지요! 이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게 되는 것입니다. 주리던 자들은 주리지 않고 임신하지 못하던 자들은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의 교만을 꺾어버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며 높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기둥들을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것들 위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기존의 세상의 질서를 옳다고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정을 좋아합니다.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들은 세상이 그들의 뜻대로 고정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득권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그런 자들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추노라는 드라마를 보면 종들이 양반들을 죽이고 자기들이 주인이 될 세상을 꿈꾸며 반역을 도모합니다. 그런데 업복이라는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양반이 종이 되고 종이 양반이 되면 지금과 같은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이라는 것이 민중 신학이나 해방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9절입니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들이란 여호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상에서 없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한나와 같은 자들입니다. 사라와 같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든 여자가 거룩한 여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자로 부름을 받는 것이 거룩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대적하는 악인들은 흑암 중에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세상에서 고난 받는 모습으로 온 자들이 메시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이 세상의 질서가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만들어놓고서 그 바벨론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기존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뒤집어엎는 방식으로 메시아가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나의 기도 내용이며 마리아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46-55절입니다. “봉독” 한나의 기도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이 세상의 기존 질서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배불리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종 이스라엘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보시기바랍니다. 한나와 마리아가 기도한 내용대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6:10-20절입니다. “봉독” 마귀와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면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되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나 사도나 간에 정말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더 깊이 알고 또한 담대히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존의 것을 확장 유지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