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열왕기상 18:36-40 엘리야의 기도(2) 2010. 5. 12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1907년 어게인 부산’이라는 집회가 부산에서 있었습니다. 부산지역의 교회가 연합하여 부흥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 기도회를 인도하는 한 사람이 부산의 모든 사찰이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부산의 어느 절에는 30만 명의 신도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런 절들이 다 무너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산의 절들은 건재합니다. 그리고 이 모임에 이명박 장로가 영상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불교계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절간이 되어버렸다면 어느 곳이 무너지겠습니까? 절이 무너지도록 기도한 것이 응답이 되려면 절이야 원래 그런 곳이니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음을 받는 교회는 그냥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참된 교회라서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22:11절 말씀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불로 대적이 사라지게 되기를 원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51-5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요한이 하늘로서 불을 내려 다 멸하게 하기를 원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 책망의 말씀을 다른 사본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그래서 요한의 별명이 보아너게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이 다 있지요!

 

그러면 엘리야의 기도와 불로 응답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사찰이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사찰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의 행태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의 교회나 기도원이라는 곳에서 행하여지는 기도회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 성령님을 다 부릅니다. 놀랍게도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 부릅니다. 그런데 바알을 위하여 비는 기도와 어떻게 닮아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8:1-24절입니다. 엘리야가 3년간 비가오지 않으리라고 선포한 후 3년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아합을 만나게 하십니다. 아합과 왕궁 맡은 자 오바댜가 물을 구하기 위하여 나왔을 때에 엘리야가 오바댜에에 나타나서 아합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오바댜는 아합의 우상숭배 천지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100명을 몰래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합 체제에서 이런 일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아합과 엘리야가 드디어 만납니다.

 

17-18절을 봅니다. 아합과 엘리야가 만나서 먼저 말싸움을 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너냐 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자가 볼 때는 엘리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후를 주장하고 풍요와 다산을 주는 바알이 비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서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가 본격적인 싸움을 제안합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다 모으라고 합니다. 850대 1로 한판 붙자는 것입니다. 왕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모읍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너희가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합니다.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고 하니 한 마디도 대답을 못합니다. 이들이 말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냐 바알이 하나님이냐”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만 그 하나님이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자기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신데 그 언약의 완성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여호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들처럼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인데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라고 하시자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성령 이야기를 하여도 그 안에 바알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알의 기도의 모습이 어떤지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송아지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씩 각을 떠나 나무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고 각자의 신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이자고 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 말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알의 선지자들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줍니다.

 

26절을 봅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서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하는 소리도 응답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놉니다. 뛰노는 것은 종교 의식적인 춤인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장단에 맞추어 돌아가며 춤을 추는 모습과 비슷하겠지요! 아침부터 점심때 까지 한나절을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으니 춤을 추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고 합니다. 그가 신이기에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외출하였는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하는지 모르니 크게 불러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얼마나 간절해 졌겠습니까?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나고 저녁 소제 드릴 때가 다 되었습니다. 거의 하루 종일 기도하고 의식을 행하고 최고단계인 자해를 하면서 까지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기도원이나 열렬하게 기도하는 곳의 모습을 비교해 보아도 될 것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자고 합니다. 그런데 간절한 소원이고 큰 소원일수록 보통으로 기도해서는 안 되고 더욱 특별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며칠 작정 새벽기도 정도는 기본이고 철야와 금식을 하면서 까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능력 있는 기도의 종에게 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그들은 마치 무당들처럼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기도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30-35절입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 아마 이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즉 12지파의 수대로 12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 둘레에 구덩이를 파게하고 송아지를 잡아서 나무위에 올려놓고서는 12통의 물을 붓게 합니다. 물이 차고 넘쳐 제단둘레에 판 도랑까지 흐르도록 물을 붓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공적인 불도 붙을 수가 없도록 차단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야곱의 이름의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 얍복강 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이제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서 남은 유다로 북은 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과 엘리야가 주의 종인 것과 주의 말씀대로 이렇게 하는 것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함이 결코 아닙니다. 이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핥은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고 합니다. 엘리야의 이름의 뜻이 그대로 백성들이 두 번이나 고백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가지 못하게 잡게 하여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입니다. 출애굽기 22:18,20절에 보시면 무당을 살려두지 말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라고 하십니다. 그 율법대로 그들을 처단합니다.

 

그리고 아합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하면서 큰 비 소식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땅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일곱 번까지 그렇게 하니 일곱 번째에 사람의 손 만한 구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게 합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 지며 큰 비가 내립니다. 바알이 우상이기에 헛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차보다 앞서서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이 모든 일을 아합이 이세벨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엘리야에게 들여온 소식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내일 이맘때까지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은 것처럼 죽이겠다고 하면서 자기 신의 이름으로 저주 맹세를 합니다.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서 생명을 위하여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아합과 이세벨의 왕궁을 불살라 버리고 심판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니 살기 위하여 도망간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승리한 것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도 아합과 이세벨은 건재합니다. 엘리야는 도망갑니다. 사환도 멀리 떼어놓고 혼자 사막으로 가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나는 내 조상들 보다 낫지 못하다고 합니다. 큰 기도의 응답 후에 처절한 탈진이 온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엘리야의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뎀 나무 아래서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 먹게 하여 호렙 산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습니다.

 

19:9-18절을 보시면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자신이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여호와를 섬기는데 이스라엘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만 남았는데 자기의 생명조차 죽이려고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여호와 앞에서 서게 하시고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있으나 그 안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고 그 이후에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으로 일하시지 아니하셔도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2:16-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입니다.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일하시지만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광적인 기도보다 세미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