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사무엘상 9:5-10 사울의 기도 2010.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6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7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10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

 

사울의 집에서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울의 아버지가 사울과 사환에게 나귀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나귀는 큰 재산이니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몇 날을 찾아도 찾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숩 땅에 이르러 사울이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아버지가 나귀보다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겠다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사환이 이 성에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은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물어보러 가자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귀를 찾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1:3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나 나귀는 그 주인과 주인의 집을 구유를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집을 나갔다는 것은 나귀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하여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무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만 아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스스로 사울이 자기에게 올 것을 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9:15-17절입니다. “봉독” 사울이 오기 전날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합니다. 사울이 들어올 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네게 말한 자가 이 사람이라고 알려주십니다.

 

나귀를 잃어버린 것도 사무엘에게 알려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나중에 사울 대신에 기름 부을 자를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택할 때에도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한국 땅에는 사무엘보다 뛰어난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대통령될 것을 알아맞히었다고 하고 김일성 죽을 것 예언했다고 합니다. 무당들도 그런 말을 합니다. 밀양의 어느 목사에게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 아들이 생겼답니다. 그런 일들이 몇 년을 두고 일어나니 목사가 그 여자를 사도로 받들어 섬기며 그에게서 나온 말을 받아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응답받았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귀를 찾으러 온 사울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영광스러운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패하는 왕을 세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고 인간 왕을 구한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을 구한 죄가 무엇인지를 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사무엘이 예언한 징조가 다 이루어졌습니다(10:9). 그러나 사울이 행한 일은 옛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10:8절을 봅니다. 사울에게 먼저 길갈로 가라고 합니다. 이레 후에 사무엘이 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네가 행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13:8-12절을 봅니다. “봉독”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병거가 삼만 이며 마병이 육천 명입니다.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되어도 사무엘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러가기 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를 보아야 사기가 오를 텐데 번제도 드리지 못하고 대책 없이 기다리기만 하니 백성들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달리 방법을 간구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말자 사무엘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미 조금만 일찍 오면 안 됩니까? 그런데 번제를 드리고 나니 사무엘이 온 것입니다. 이때 사울이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오지 않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적들은 곧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여 부득이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사울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든지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너무나 냉정하게 말합니다. 13절을 봅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을 내리신 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명령을 지켰으면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인데 지키지 아니하였기에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합한 자를 구하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한번이 일로 왕위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다 흩어지고 적들이 쳐 들어오는데도 아무대책도 없이 손 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무언가 방도를 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린 것이 무엇이 잘못 된 것입니까? 그러면 여호와께 은혜도 구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왕이라고 세워놓았더니 아무른 대책 없이 사무엘이 오기만 기다린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를 믿을 수 없으니 백성들이 도망가기 바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란 끝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데요? 그렇지요 죽음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사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습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데드라인까지 가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죽음의 선입니다. 어떤 선택에 있어서 자기 뜻을 따라 어떤 방도를 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애굽의 선별된 병거 600승이 좇아옵니다. 그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병거가 다 동원되어 추격을 합니다. 앞은 홍해바다입니다. 모세를 향하여 원망할 때 모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해석을 독일성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내는 일은 출3: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하시는 여호와이시고, 이스라엘 스스로는 그 일에 이바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블레셋이 쳐들어 온 것은 병거가 삼만 승입니다. 거기다가 마병이 6천입니다.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하고 번제도 화목제도 드려야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오늘 식으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큰 교회들이 생기니 그리고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성장에 좋다는 프로그램들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미나 저 세미나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결국 교회 문 닫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로만 하는 것이고 속으로는 자기 생계를 더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울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기에 은혜를 구하는 방편으로 번제를 드렸는데 그때 사무엘이 와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이라고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무언가 계속하여 사업을 벌이면 우리 목사님 일 열심히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목사가 무엇을 하느냐고 합니다. 지금 살아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보라고 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으니 무언가 자기들이 행복해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교회에 대한 이상형이 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여도 그것은 자기들의 관심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너무나 구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희생이나 공로가 많이 들어갈수록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사울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사무엘상 14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자기 병기든 자와 함께 나아가는데 어떤 자세로 가는가 하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진을 향하여 나갈 때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확증을 구합니다.

 

적이 우리가 너희에게 가겠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것이며 적들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의 손에 넘겼음이니 이것이 우리의 표정이라고 하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니 정말 그들이 올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올라가서 요나단과 병기 든 자가 반나절 동안 20명가량을 죽입니다. 그러자 모든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큰 떨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이 자기들끼리 칼로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입니다.

 

이미 붙여주신 전쟁인데 사울이 무엇을 명령합니까? 금식을 명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전쟁이며 그 승리도 요나단의 믿음으로 이긴 전쟁인데도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금식을 선포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여호와의 전쟁에 끼워 넣겠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승리를 하게 되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고행이나 금식이나 금욕적인 일들이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사울의 모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1-3절입니다. “봉독”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최초로 공격한 민족입니다. 이들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각 왕을 살리고 짐승 중에 좋은 것은 살려냅니다. 사무엘이 오지 자기는 말씀대로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이 짐승소리들이 무엇이냐고 하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남겨왔다고 합니다. 그때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낫다고 하면서 당신은 우상숭배를 한 것이라고 하면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에 여호와도 당신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무엘상28:3-7절입니다. “봉독” 사무엘이 죽고 나자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사울이 두려워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러나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쫒아내어 놓고서는 이제 답답하기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묻는 것입니다. 신접한 자가 사무엘을 불러올리는데 이것이 가능한 일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그 신접한 여인의 말은 평소에 사무엘이 한 말 그대로 사울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접한 여인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기도들이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기도는 사울의 기도에서 벗어난 기도입니까?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은혜를 구한다고 한 것이 우상숭배가 되어버렸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가져온 예물이 오히려 불순종이 되어버렸고, 응답이 없으니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모습이 이 땅의 기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근원적으로 기도를 돌아보고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을 주시도록 더욱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