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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8:9~14   악을 행하는 담대함 2019. 6. 19

 

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해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런데 다 알 수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우리는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일들을 알아보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힘을 다하여 세상의 일들을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론은 여호와 경외입니다만 세상의 이치를 다 알게 되었기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실수 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는 자들만이 여호와를 경외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호와께서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는가 하는 사람은 원망만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해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니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표준 새 번역은 이 세상에 권력 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은 남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자는 때가 되면 화를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제군주 시대의 왕들은 백성들을 주장합니다.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다스립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주장한 자들도 때가 되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즉시에 벌을 받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악을 행하기에 담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권력을 쥔 자가 되려고 합니다. 금력을 가진 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고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높아지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주무르고 싶어서 따라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 성공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을 모으고 큰 건물을 지으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목사의 자기 야망을 주장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여 주장하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여기에는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습니다. 월요일 전주 모임을 인도하는 분이 저의 설교 유튜브 구독자가 38천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 보니 38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숫자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설교가 사람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저도 자의든 타의든 여러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봅니다. 어떤 분의 설교를 들어보고 평가 해 달라고 합니다. 안 들어볼 수가 없어서 몇 편을 듣고서 말씀을 해 주기는 하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어떻게 설교 몇 편을 듣고 그 사람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큰 방향성만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너무나 자기주장이 강한 것을 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동원하여 자신의 설교만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모습들도 사람이 사람을 주장함으로 타인도 자신도 화를 당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가르치기 보다는 성경으로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면 족합니다.

 

고린도후서 1:24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책망도 하지만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미 서 있는 그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려줌으로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고전1:20). 그러므로 믿음을 주관하는 자는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1~3절입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여기서 장로란 오늘날 교회의 목사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나 전도자는 자기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나 주장하기에 세상도 교회도 요란합니다.

 

10절입니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번역을 보면 악인들이 결국 죽고 장사 지내게 되면 그것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 번역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영어 번역의 하나를 봅니다(NLT). 악한 사람들이 죽어 매장될 때 칭송이 자자한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자들이야말로 성전을 수시로 출입하던 자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못된 일을 저지른 바로 그 성읍에서 그들이 칭송을 받는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고!” 이 구절을 민영진씨가 풀어쓴 내용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정중한 장례식을 치르고) 무덤에 잘 안장(安葬)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거룩한 곳(예배처소? 법정?)에서 그들은 늘 칭송을 받았었고 그들이 그처럼 (악하게)행동하며 (살던)바로 그 성읍에서도 늘 찬양을 받으니 도대체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다고 합니다. 10절에서 악인이 온갖 악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읍에서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세상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악을 행하여도 벌을 받기는커녕 살아생전에도 호의호식을 하더니 죽어서도 칭송을 받는다면 내가 착하게 살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악을 행하여도 징벌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일이 자꾸만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피디수첩에서 국회의원들이 농사짓는 땅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국회의원 약 3분의 1이 농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농지를 취득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래서 농지를 사면 어떤 농사를 짓겠다는 것을 서류로 제출해야 하며, 일 년에 90일 이상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 부인의 이름으로 농지를 사고, 지목 변경 하고, 그 쪽으로 개발을 하여 땅 값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다들 벼락에 맞아 죽었다면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면서 살다가 평안하게 죽고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물려주니 악을 담대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시편 73:12~17절입니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기자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형통하여야 하는데 그 반대되는 현실을 보면서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악인이 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가 종일 재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혼자 깨끗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다면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악을 행하기에 점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성전에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세상의 현실이 비록 악인이 형통하게 보여도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서는 악인이 즉시에 벌을 받는 모습이 보지지 않기에 사람들은 아직도 담대하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4절 표준 번역입니다.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라고 한다.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악인의 벌을 받아야 하고 의인이 상을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악인이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이 헛되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으로 11~14절을 봅니다. “11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당장 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할 생각밖에 없다. 12 백번 죄를 짓고도 버젓하게 살아 있더구나.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하느님 앞에서 조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잘 되어야 하고 13 하느님 두려운 줄 몰라 하느님 앞에서 함부로 사는 악인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져야 될 줄은 나도 확신하지만 14 땅 위에서 되어 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헛된 일이다.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는가 하면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쁜 사람이 받는다. 그래서 나는 이 또한 헛되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역사의 현실은 악인이 죄를 지어도 당장 벌을 받지 않으니 죄 짓은 일에 담대할 뿐 아니라 나쁜 일을 할 생각만 합니다. 그러니 백번 죄를 짓고도 버젓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자가 잘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져야 될 줄을 확신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고 착한 사람이 받을 보상을 악인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도 헛되다고 한 것이 해 아래 전도자가 살펴본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전도서의 깊이를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는 일이 무수합니다. 착하게 산 사람들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한 자들이 가로채 갑니다. 그런데 그 악한 자들이 대대로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이러하다면 차라리 악을 행하는 일에 담대하여 지자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악을 행하는 일에 담대하여 힘 있는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주장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박국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1)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악이 아무리 가득하여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믿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악인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의 끝이며 이 십자가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이 역사가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지당합니다. 십자가 한편에 달린 강도의 말입니다. 그 한 편의 강도가 예수님은 죄가 없이 이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이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잠시 사는 동안 환난과 고난들이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담대하게 행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는 것이 버려두심이라는 저주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2:8), 성령님과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심으로 이루어내십니다(8:26, 34). 그러므로 성도는 죄 짓은 일에 담대한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갑니다(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