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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7:1~9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2020. 4. 8    (88장)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기도 하고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면 1~6절까지 친구들, 7~9절 상 반절까지 남자. 다음 주에 볼 9절 하 반절부터 13절까지는 여자가 부르는 노래로 표시를 합니다. 다른 번역은 오늘 본문 전체를 남자의 노래로 표시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남자의 노래로 보면서 남자가 여자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아름답다고 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늘 변하고 흔들립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사랑도 잠시 잠간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상대방의 단점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단점마저 매력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콩깍지가 벗겨지면 단점이 드러날 뿐 아니라 장점이라고 생각한 것조차도 미워지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랑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노랫말 중에 사랑이 없는 노래가 없을 정도로 사랑의 노래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 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 참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안다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아는 과정은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가 일반적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화목제물을 마련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보내셨습니다. 화목제물로 용서가 일어나는 것을 구약에서는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과 제사마저 자기들의 의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 화목제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렸지만 그 죽임당한 분이 죽인 자를 용서 하시고 사랑하시는 내용이 성경의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9:16~19절입니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바울이 율법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버립니다. 아나니아 선지자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그 비늘 같은 것을 모세의 수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세의 수건이 벗겨져야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13~18절입니다.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 곧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을 때에는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인데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려진 눈으로 행한 일은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없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건이 벗겨지고 나니 주의 영광을 봅니다. 십자가로 나나타난 그 주님의 영광이 영원한 영광임을 주의 영으로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이 나타나면 우리가 주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뿐 아니라 주님도 그 안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의 빛으로 보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어떤 변호사분은 술람미를 하늘의 참된 지혜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아도 괜찮은 것은 지혜가 솔로몬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속하였다는 말을 합니다. 상호 소속된 사람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 사랑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내가, 내 안에 네가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루십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적용하여 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고 찬양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한 그 사랑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게달의 장막과 같은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자신의 죄가 어떠함을 알고 그 죄가 용서 받고 가려짐을 받는 것이 참된 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그 사랑의 완벽함만 자랑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술람미는 귀한 자의 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하기에 그 출신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출신마저 귀하다고 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과거의 추함과 더러움조차 주께로 인도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귀한 것들이 가득함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 귀함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다 아름답습니다.

 

첫 번째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본문에서 성경에서 신체의 부분들을 말한 내용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이사야 52: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예루살렘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은 이어지는 고난 받은 종의 노래로 인하여 구원이 일어나기에 복음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신부를 아름답다고 하는 발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전하는 그 발이 아름답습니다.

 

두 번째 넓적다리입니다. 넓적다리가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다고 합니다. 넓적다리는 허벅지를 말하지만 넓게는 생식기가 있는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문자대로만 보면 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말한다고 보기에 아가서로 부부의 사랑을 에로틱하게 그려서 논란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넓적다리로 표현된 단어는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자기아들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맹세시킬 때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24:2,6). 그리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침을 당한 곳을 전에는 환도 뼈라고 번역을 했는데 지금은 허벅지 관절이라고 합니다(32:32). 그리고 이 허벅지 곧 야곱의 몸에서 후손들이 나왔다고 합니다(46:27). 그러므로 넓적다리 곧 허벅지가 아름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기 힘이 침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생식의 능력이 아니라 약속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처 입는 넓적다리가 아름답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음 같다고 합니다. 배꼽이라는 단어는 아가서에서 단 한번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배꼽을 아름답다고 비유하는 내용을 보면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담은 둥근 잔과 같다고 합니다. 섞은 포도주는 포도주에 향료나 꿀을 섞어서 잔치 때에 마시는 귀한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허리의 아름다움을 백합화로 두른 밀단과 같다고 합니다. 허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에 나옵니다. 허리를 태라고 합니다(25:23).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두 국민을 말하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고 한 이 내용은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2 이하)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받는 일은 일방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랑을 말함으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계시를 위한 언약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에 단지 섞어질 육체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노래하여도 그 사랑을 받은 자격이 전혀 없는 술람미가 그 사랑을 받는 것은 로마서 9장이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고 합니다. 유방이라는 단어를 가슴이나 품으로도 사용합니다. 이사야 66:10~11절입니다.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1절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의 품에서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유방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마치 어린 아이가 어미 품에서 젖을 넉넉히 빨고 만족한 상태에 있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12~14절을 봅니다.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시편 131편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단어의 연결은 아니라도 의미적 연결이 됩니다. 아가서의 남자와 여자로서 그 품을 그리워하고 아름다워 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말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품에서 만족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품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목과 눈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머리가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메였다고 합니다. 왕이 머리카락에 메였다는 표현을 보면서 저는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러 갑니다. 이곳에 죄인인 한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후에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런 예수님을 속으로 비난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았고 기름을 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먼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머리카락에 예수님이 메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이 먼저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에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니다.

 

본문 6~9절입니다. 봉독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체부위가 키와 콧김과 입입니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입은 좋은 포도주 같다고 합니다. 콧김이라는 같은 단어가 성경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2: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의 콧김이 사과 냄새 같다고 하는 말은 제대로 된 생명의 기운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콧김 곧 생명의 기운이 나오는 것이 생명 된 신랑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입은 좋은 포도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주신 그 포도주입니다. 그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 흠뻑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때는 오직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때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신랑이 가장 아름답게 보십니다. 스스로 자기를 단장하고 나오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인 한 여인은 그 사랑을 받았기에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다 사랑스럽습니다. 이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고, 영원히 받을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된 신부입니다. 이 신부는 그 신랑을 사랑함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신부된 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할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신부를 향하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라고 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마라나타를 인사말로 하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