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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8 내 의()의 하나님 2020. 6. 10      (494장)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1)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편도 표제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시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현악이란 다윗이 수금을 잘 켜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현악기로 반주(伴奏)를 하면서 찬양한 내용입니다. 반주란 말 그대로 노래를 받쳐주는 역할이기에 그 노래의 가사 곧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연주회(演奏會)는 연주하는 사람의 연주가 중요하지만 찬송은 연주보다 그 내용 즉 가사가 중요하기에 교회에서는 연주자라고 하지 않고 반주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셀라는 간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어떻게 부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불렀다고 하여도 그 구하는 내용이 성경의 내용이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복음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딤후1:10). 그러므로 그 구하는 내용이 자아의 확장이나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한다면 그런 기도에 아멘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곤란 중에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곤란을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본 시편 3편의 내용으로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반역을 합니다. 그렇게 곤란한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장에 대적이 물러가고 왕권이 회복되는 것으로 너그럽게 대하여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용서 하셨다는 그 용서가 다윗에게는 한없는 너그러움입니다. 그런데 그런 용서를 받은 다윗이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1절에서 곤란 중에 자신을 너그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곤란 중에 자신을 너그럽게 하셨기에 다윗은 그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간음하고 살인한 자는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가 됩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이루어 낸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다윗은 두 번이나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의란 여호와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6:24~25절입니다.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광야 40년을 지난 후 요단강 건너기 전에 모세가 언약을 갱신하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망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것은 왜 인간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로움이란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봐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냥 너그럽게 봐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죄로 죽은 우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도 죽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의로움이 됨을 간음과 살인과 죄의 책망과 용서를 통하여 온 마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사람들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구하고 거짓을 구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임을 조롱하는 자들이 다윗의 대적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택하신 경건한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경건한 자로 시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건한 자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는 성경에서 불의한 자라고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너희는 1)떨며 범죄 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여기서 떨며 범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각주를 보면 분 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노하며 범죄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시편 2편에서 보면 분노하는 자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이 이미 용서 받았는데 다윗이 당하는 고난을 보고 사람들이 조롱을 합니다. 그들을 향하여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들의 고난을 보고 조롱하지 말고 자기 마음에 말해보라는 겁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자기의 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언제가 자기를 좋게 보려고 합니다. 자기의 말과 행위는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 것이 성경의 죄입니다.

 

제가 죄를 설명할 때에 자아(自我)라는 단어를 종종 말씀드립니다. 피조물 주제에 스스로 자()자를 쓰는 것도 타락한 죄인의 모습니다. ()는 손수()변에 창과()자입니다. 금단(禁斷)의 열매를 먹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여기서 금자도 나무 두 그루를 통하여 보여준다는 의미가 금()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주지 않습니다. 죄인의 제물을 받아 주시지 않으심이 마땅하지만 자기의 것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화가 나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합니다. 그 가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성을 쌓고 창과 칼을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키며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창으로 찔러 죽이겠다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자아들이 부인됨이 예수님을 믿는 길인데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아를 확장시켜 달라고 한다면 이런 자는 아직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본문 4~5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4절에서 떨며 범죄 하지 말고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하는 자들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의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의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모습이며 죄 용서 받은 자의 모습들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떠들며 분노하는 것이 죄가 되기에 자리에 누워 자기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회개할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죄를 알게 되면 의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겁니다. 그러면 의의 제사가 무엇입니까?

 

시편 51:14~17절입니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의 사건 이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은 후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의의 제사를 보려고 합니다. 피 흘린 죄에서 건져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제사와 번제란 자기 죄를 알라고 주신 제도입니다. 그런데 소나 양을 바치면서 그것을 자기의 의로 삼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의의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사야 66:1~5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5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시편 4편의 해석과 같은 내용입니다.

 

본문 5절을 다시 봅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의의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율법의 조문을 따라 소를 잡아 바치고 양을 잡아 바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제사를 통하여 자기 죄를 알고 속죄의 의미를 알라고 주신 것인데 그런 행위로 자기의 의를 삼았기에 의의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의 제사란 이미 살펴본 대로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의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를 쌓으려고 한 제사였기에 의의 제사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시편 32:1~7절을 봅니다.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는 6절의 각주를 보면 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알고 주께 기도하여 용서 받은 자가 경건한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하는 자들이 대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1~2절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복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받은 이 복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받은 복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입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그 얼굴빛을 비추어 주셨다고 하고 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다고도 합니다.

 

본문 6~8절을 봅니다. “봉독여호와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 합니다. 제사장의 축복입니다(6:25,26). 그러나 여호와의 얼굴을 바로 비추어주면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름으로 가리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 자기를 낮추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너무 상하여 보여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의로 가득한 자들이 예수님을 보면 죄인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들, 구약 시편의 표현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그 얼굴의 비침을 받은 자는 너무 기뻐서 다른 사람의 곡식과 포도주 풍성함보다 더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런데 내 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어 주실 때에 어떤 얼굴이겠습니까? 우리는 한없는 자비와 긍휼과 온화한 사랑의 얼굴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얼굴이 어떠하였습니까?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더더구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부르짖는 그 얼굴에서 누가 하나님을 얼굴을 보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 몰트만이라는 사람은 믿음이 움텄다고 합니다. 몰트만은 2차 대전 때 독일 군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연합군에 사로 잡혔을 때에 자기 민족이 어떤 악을 저질렀는지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 포로들에게 나누어준 성경에서 마가복음에서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분을 보면서 참으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 그 분임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학자가 되고 쓴 책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오래 전에 그 책의 뒤표지에 있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본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1512~1516년에 그린 제단화 그림입니다. 안토니오 수도원의 제단위의 그림인데 창문처럼 열면 여러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을 그린 것인데 불치병의 환자들이 그 그림을 보면서 치유를 기원하였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장면의 그림은 손과 발에 못이 박혔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이 뒤틀려져 있으며 온 몸에 검은 점들이 찍혀 있습니다. 얼굴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 맥각 중독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명은 나중에 붙였겠지만 오염된 호밀 빵을 먹고 오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고통으로 손과 발이 오그라든다고 합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의 발을 그려놓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발의 모습과 같이 뒤틀려진 그림도 보았습니다. 그 수도원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는 자들이 그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평소에 조건이 좋은 사람이 그 얼굴을 본다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그림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니까?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니까?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배가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무엇으로 배부를 수 있습니까? 의가 한량없이 주어져야 배가 부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6:33). 하나님의 나라는 의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자기라는 나라의 확장과 자기의 의에 대한 확장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 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9:1~10절입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부자이며 세리장이인 삭개오는 세상의 곡식과 포도주가 가득하여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삭개오를 만나주시고 그 집에 가시니 그는 즐거워하며 그 부함의 표가 되었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이렇게 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삭개오에게 그 얼굴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새로운 기쁨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재산의 넉넉함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의가 한량없이 주어지기에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고린도전서 1:30~31절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구할 것이 내 의의 하나님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었다는 이 말씀이 참으로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삭개오와 함께 기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