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열왕기상 3:1-10 솔로몬이 구한 것 2010. 4. 21

 

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의 기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무엇을 줄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였고 그것이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서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일 천 번의 제사를 정성으로 드리자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인데 그 소원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면 나머지는 보너스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의 초점은 결국 일천 번에 걸친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결론입니다.

 

먼저 일천번제란 횟수로 일천 번(番)이 아니라 한꺼번에 일천 마리의 번제(燔祭)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린 곳이 기브온 산당입니다. 기브온 산당에는 광야에서 만든 여호와의 성막과 놋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는 기브온 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스스로 돌아온 후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정예병사 삼만을 동원하여 수레에 싣고 호위하며 오려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으로 다시 오벧에돔에 집에 삼 개월을 있었습니다. 오벧에돔이 언약궤를 모신 후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레위지파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모셔 갑니다.

 

그때부터 다윗성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 앞에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삼하6:17). 그리고 기브온에서도 제사장들을 세워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대상16:39-40). 그러니 두 곳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드린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봅시다. 성전이 건축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고 합니다.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이 말은 다른 것은 다윗을 따랐지만 제사는 다윗처럼 언약궤 앞에서 드리지 않고 산당에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산당은 성전이 건축되고 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브온은 장소가 넓었습니다. 다윗 성에서 언약궤를 위하여 마련한 임시장막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 번제를 드렸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고 기브온에서 물으신 것이지만 일천번제라는 조건을 보고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시편 50편을 보면서 미가서를 함께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물의 양과 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의미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로 언약을 맺은 것은 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의 언약을 모르고 정성이나 제물만 많으면 된다는 것은 바로 산당제사이며 바알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5-36절에서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음을 받겠느냐고 하시면서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에게 이렇게 응답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솔로몬의 일천 마리의 번제제물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그의 후손에게 왕위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2-17절을 봅니다. “봉독” 다윗의 몸에서 날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과의 이 언약 때문에 솔로몬이 왕이 되고 제사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3:14-15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를 말씀하시니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귀와 영광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다윗을 이야기 합니다. 다윗처럼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네 날이 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기브온 산당에서 다시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면 될 텐데 어디로 갑니까? 예루살렘에 갑니다. 다윗이 모셔다 놓은 언약궤 앞에 가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일천 번의 제물을 바치며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원에 가자고 해서 몇 번을 갔는데 기도를 잘 못한다고 하니 기도원 원장이 하루에 주기도문 백번과 사도신경 백번을 외우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자주 가지 않으니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고 하면서 내 말 듣지 않으면 합병증이 올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이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뇌경색이 살짝 왔다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겁도 나고 어떻게 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이런 모습이 산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솔로몬이 구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흔히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였다고 합니다. 11절에 보시면 솔로몬이 자기를 위하여 장수도 구하지 않고, 부도 구하지 않고,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않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성의 송사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지혜인데 이것을 솔로몬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9절에서 듣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6-9절을 봅니다. 솔로몬이 구하는 것도 결코 자신의 제사 드린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윗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셔서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출입이란 여호와 앞에서 백성을 거느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들을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은 백성들이 송사하는 것을 듣고 판별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도 다윗이 여호와 앞에 출입한 것처럼 그런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5:2절입니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다윗에게 나아온 백성들이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출입할 줄을 모른다는 것은 다윗처럼 백성들을 여호와 앞에서 출입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평생 늘 주님께 묻고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묻지 않고 행한 일이 크게 두 번인데 그것이 다윗의 범죄와 연결되는 밧세바와의 간음과 그로 인한 우리야의 살해와 인구조사입니다. 주께 묻고 주께 들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만 범죄 하는 일은 주님께 묻지도 듣지도 아니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주관과 판단으로 행하면서도 주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이전에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도 나의 소원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어느 고삼학생을 둔 부모가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도록 기도한다고 하니 부모의 안색이 좋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기대는 명문대학을 마음에 두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만을 강조하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부모이 욕심인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앞에서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도 제가 욕심이지만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한번 만져주시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 움직이지를 못하니 왜 그런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도 주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나의 소원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골라 듣는 것입니다. 마치 이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카트에 담듯이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주님의 음성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증거 할 때에 들으라. 이스라엘아! 이렇게 하고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더욱더 듣는 것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자기 말만 하기를 좋아합니다. 텔레비전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1초도 걸리지 않고서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정말 구하여야 할 것이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무엇을 줄꼬? 하였을 때에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 것은 참으로 다윗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듣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듣는 마음을 받은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솔로몬의 재판이라고 유명한 재판을 한 것입니다. 산아이나 죽은 아니나 둘 다 칼로 나누어가지라고 함으로 친 어머니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기에 쉬워 보이지만 이 재판을 3:28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듣는 마음이 있는 것이 솔로몬이 구하여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도 계속하여 듣는 마음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듣는 마음을 거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왕기상 11:4절입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은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다윗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께서 두 번이나 경고를 하였습니다. 9절입니다. 두 번이나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주겠다고 하시지만 다윗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의 대에 행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이 사라짐으로 나라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사울도 듣지 아니하였을 때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15:22-24절입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이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백성들의 말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이웃의 말도 제대로 분별하여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세상이 두렵고 이웃이 두려운 것입니다.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들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들을 자만 듣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마르다 중에 더 좋은 것을 택하여 빼앗기지 아니할 것을 택한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그는 열일 제쳐두고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의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