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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0:12~17 ‘너’에 대한 ‘그러므로’ 2014. 5. 21


30:12~17절입니다.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13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14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15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16 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30장부터 33장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말씀 중에 새 언약의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야곱을 흩어버린 자들을 멸망시키신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멸망가운데 야곱은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않으시고 법에 따라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구원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멸망해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자기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구원을 받는 자들은 반드시 징계가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중한 상처를 입고서 약도 없고 처방도 없는 자의 상처를 치료하여 새 살이 돋아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앞의 단락인 10~11절이나 뒤에 나오는 18~21절의 ‘야곱’이나 ‘이스라엘’ ‘너’ 또는 ‘그’는 남성입니다. 그런데 12~17절에서 ‘너’는 여성 단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에 여러 표현으로 부르십니다. 아들로, 아내로, 백성으로, 신하로, 종으로, 양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는 여성 단수로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고 남 유다도 거의 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아주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남아있고자 하는 자들은 극히 악한 무화과이지만 포로로 끌려가는 자들이 극히 좋은 무화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망하여 끌려가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좋게 보시고 상처를 치료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사람들을 한 여성으로 말합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가련한 한 여인의 상처와 부상을 그 어떤 누구도 고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판관이시지만 이미 여호와를 배반하여 떠나버린 이 여인에게는 어느 누구도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다고 합니다.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멸망만 남았습니다.


14절입니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다를 사랑하던 자들이란 27장에서 보았습니다. 반 바벨론 동맹을 맺기 위하여 시드기야에게 온 예루살렘 주변 나라들인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두로와 시돈입니다. 이들이 사신을 보내어 시드기야 왕과 의논하였지만 바벨론의 공격 앞에 어느 누구도 유다를 도와 나설 나라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유다의 악행과 죄가 많기에 여호와께서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의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기 위하여 잔인한 징계를 내렸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징계를 하심으로 주변에서 사랑하고 도왔던 자들이 잊어버리고 다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자 부르짖게 됩니다.


15절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고 하십니다. 앞에서 본 중한 상처에 대하여 약도 없고 처방도 없는 지경에 이르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중한 상처는 너의 악행과 너의 죄가 허다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너에게 행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악을 행하고 수많은 죄를 짓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이스라엘만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개인으로 적용해도 됩니다. 나보다 더 악한 자들은 형통하게 잘들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대우하느냐는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회도 다니고 예배도 하고 헌금도 하고 회개도 하는데 왜 이렇게 사방팔방 어려움만 당하고 도대체 치료할 약도 처방도 없게 하시느냐는 항의가 나오지 않습니까?


아모스 3:1~2절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출애굽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잡족들도 함께(출12:38)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보고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응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나라는 택하여 구원하지 않았기에 보응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이제 한 여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너’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이상한 접속사입니다. 다시 12~15절을 봅니다. ‘너’의 악행과 죄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중하여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주셨습니다. 스스로는 고칠 수 없는 상처입니다. 약도 처방도 없어서 부르짖습니다만 왜 부르짖느냐고 하시면서 네 악행과 죄로 인하여 이런 일을 여호와께서 행하셨다고 합니다. 부르짖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죽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신다면 ‘그러므로’ 보다는 ‘그러나’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구원한다고 하셔야 하시는데 ‘그러므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문법적으로도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다른 구원의 메시지는 대부분 너희가 이러한 악행과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너희가 악행과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을 하겠다는 것이 구원의 선포가 되는 것입니까? 한글 개역은 ‘그러나’인데 이번 개정에서 ‘그러므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보다 ‘그러므로’가 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드러나게 합니다.


‘너’는 악행과 죄로 인하여 마땅히 너의 원수들이 받아야 될 고난과 잔인한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네가 부르짖어도 너의 악행과 죄로 인한 것이기에 내가 너에게 이런 일을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다 죄로 인하여 멸망당하여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언약과 나의 사랑을 따라 너를 구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간에 다 악행과 죄를 스스로 치료할 약도 처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며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 물이 되리라고 합니다. ‘너’를 잡아먹고 사로잡아가고 탈취와 노략질을 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 착각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힘이 세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긴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심판하시면서 ‘너’를 구원하여 내심으로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리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주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17절을 새 번역과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너를 보고 '시온은 쫓겨난 여자요,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인이다!' 할지라도, 진정 내가 너를 고쳐 주고, 네 상처를 치료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소박데기' 또는, '퇴물 기생 시온'이라고 불리웠으나, 이제 너희의 상처에 새살이 돋아 아물게 하여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가 여성 단수명사이기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생생하게 보입니다. ‘너’를 ‘시온’으로 봅니다. 유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열방이 조롱합니다. 쫓겨난 여자,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여인, 소박데기, 퇴물 기생으로 불리는 ‘너’ 이기에 그러므로 내가 너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구원은 새 언약으로 이루어주십니다. 이것이 ‘그러므로’의 구원입니다.


이사야 1:2~6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맞아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사야 57:15~18절입니다. “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러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들과 다투시고 노하시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투시거나 노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과 혼이 피곤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17~1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탐심과 죄악으로 그를 치고 얼굴을 가리셨지만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매를 든다고 고쳐지지 않습니다. 매가 두려워 잠시 머뭇거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매를 맞아서 온통 상처뿐인데도 여전히 자기 마음의 길로 갑니다. 그 길을 하나님께서 보셨기에 그를 고쳐주시며 인도하시며 위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아무리 매로 쳐도 고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그러므로’ 자기 언약으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에스겔 16장에서는 처음부터 버려진 계집아이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살리시고 거룩한 신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그 지위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위를 가지고 온갖 음행을 합니다. 창녀는 돈을 받고서 몸을 팔지만 이 여인은 돈을 주면서 남자들을 삽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분노하십니다.


에스겔 16:38~42절입니다. “38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 너를 심판하여 진노의 피와 질투의 피를 네게 돌리고 39 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네 누각을 헐며 네 높은 대를 부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두며 40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41 불로 네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에게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42 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오늘 본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이 끝이 아닙니다.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이 여호와께서 고쳐주시는 자기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호세아 3: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여 삽니다. 이 여인이 결혼하여 살다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습니다. 이 여인을 값을 주고 찾아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우상숭배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언제 실현이 됩니까?


호세아 3:4~5절입니다.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왕, 지도자, 제사, 주상, 에봇, 드라빔 이런 것들이 다 폐하여집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받은 제의와 율법으로 금지한 우상숭배도 다 폐하여 진 그 마지막 날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에 왕 다윗을 찾는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을 찾습니까? 다윗에게 언약한 영원한 언약의 완성 자에게 은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의 ‘그러므로’와 호세아 3:1절에서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평소 생각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죄를 지었다면 깨닫고 회개하여야 벌을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동안 우리가 진리처럼 여긴 생각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대로 두시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자들임을 이미 아시고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하시고 일방적으로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먼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 먼저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서 그 갈비뼈를 적출하여 내 뼈 중에 뼈이며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만들어내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행함과 돌이킴이 먼저가 아니라 영원 전에 언약된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그러므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끊임없이 세상으로 향하는 본능들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과 이야기 중에 자기 남편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금도 여건만 허락이 된다면 필드로 나갈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여건만 허락이 된다면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달려갈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언약과 희생이 먼저입니다. 그 언약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흰 옷 입은 무리가 나옵니다. 이들의 찬양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이들은 큰 환난 중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의 사랑이 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허다한 무리이지만 그리스도가 보시기에는 단 하나의 ‘너’라는 신부입니다. 요한 계시록 19장의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이러한 신부는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택함을 입었기에 그 어떠한 창녀라도 그 언약의 능력으로 거룩하고 점도 흠도 티도 없는 온전한 어린 양의 신부로 세우시는 것이 ‘너’에 대한 ‘그러므로’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