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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7:1~22 멍에를 메고 2014. 4. 23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말씀하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3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주어 에돔의 왕과 모압의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의 왕과 시돈의 왕에게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주에게 말하게 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너희의 주에게 이같이 전하라 5 나는 내 큰 능력과 나의 쳐든 팔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노라..................


우리나라에 강남불패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불패라는 말과 비슷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루살렘 불패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기에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념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주입된 사상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성전조차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겠다고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 상 9:6~9절입니다. “6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솔로몬이 성전 완공 이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어 제사가 드려진다고 안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배신하여 다른 신을 섬기고 경배하면 그 약속의 땅에서도 끊어 버리실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과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신 이 말씀대로 지금 예레미야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공격을 받고 성전의 기구들이 다른 나라로 옮겨짐으로 이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는 지경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절에서 시대적인 배경으로 여호야김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앞에 1)이라는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시드기야로 되어있고 그 근거로 3, 12. 20. 28:1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시드기야시대입니다. 이 차이점은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임하신 내용이지만 시드기야 에게 전하여진 말씀으로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필사자의 오기로 보기도 합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괄호로 되어 있거나 없음이라는 표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지만 어떤 사본에는 없기에 그대로 번역하여 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이어지는 3절에는 시드기야로 나옵니다.


2~4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라고 합니다. 여기서 줄과 멍에는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줄과 여러 개의 멍에를 만들어 예레미야의 목에 걸고 유다의 왕을 보려고 온 외국의 사신들에게 보여서 그들의 왕들에게 알리게 하라고 합니다.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외국의 사신들을 부른 이유는 반 바벨론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입니다. 이들이 모인 자리에 예레미야는 줄과 멍에를 목에 걸고 가서 그들의 왕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으로 땅과 지상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사람과 짐승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사람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옳은 사람입니까? 제국을 이룬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들을 힘으로 정복한 절대군주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 보시게 옳은 사람이냐 하는 항의가 나올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바로 시편 73편이나 하박국서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악인이 그 보다 더 의로운 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5절의 이 말씀에 아멘이 된다면 성경을 보는 것도 자기 인생을 해석하는 것도 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분의 저의 설교를 듣고서 이렇게 문자로 보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가끔 뇌를 씻거나 비워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과 같은 부분을 볼 때에 더 그런 생각이 날 것입니다. 이런 분에게 제가 답을 할 때는 우리는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답을 합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 먹고서 우리 나름대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바벨론의 왕을 여호와 보시기에 옳다고 하시면서 그로 하여금 주변의 나라들을 다 붙여주셨다고 하는 이런 말씀이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선악의 판단을 하고 있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5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를 한글개역에서는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입니다. 다른 번역은 ‘아무나 내 눈에 드는 사람에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가 선하고 옳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는 말씀도 백성들이 원한 사울 왕과 대비시키기에 좋은 소년 다윗을 택하신 것이라고 사무엘서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나 느부갓네살을 여호와께서 자기 옳으신 대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여 사용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시비를 건다는 자체가 이미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있는 죄인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런 것이 죄임을 알고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음을 알고 주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을 좋아하는 사람을 정말로 보기 힘듭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 나쁨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면 그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해 온 것들을 이제 하지 않겠다고 나옵니다. 사람이 자기 수고한 것만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열심히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이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자기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신다면 내가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난주일 오후 사무엘상 30장의 동일한 분배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죄인 인줄 알아야 주의 처분에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의 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불패를 외치던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들이 어떤 아우성을 치든지 다른 이방의 나라들이 무어라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옳으신 대로 행하십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더 좋겠습니다. 여호와의 행하시는 모든 일이 다 옳습니다. 나를 심판하시고 죽이셔도 옳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인정하셔야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아멘이 안 되면 가면 갈수록 분노만 일어날 뿐입니다.


6~8절입니다. “6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섬기게 하였나니 7 모든 나라가 그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리라 또한 많은 나라들과 큰 왕들이 그 자신을 섬기리라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


5절 말씀이 우리에게 수용이 되어야 이 말씀에도 아멘 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땅을 여호와의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이방의 왕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는 것입니다. 땅만 아니라 들짐승도 그에게 주어 섬기게 하십니다. 그런데 한계를 정하여 주십니다. 그 한계는 느부갓네살의 아들과 손자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꼭 느부갓네살의 혈통적인 손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 3대를 말씀합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나라들과 큰 왕이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러므로 지금 바벨론의 왕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9~11절입니다. “9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10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 너희가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망하게 하느니라 11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지금 실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목에 줄과 멍에들을 메고서 바벨론의 왕에게 이렇게 종으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제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다시 희망을 말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과 빼앗기 성전의 기구들이 곧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밭을 갈며 살라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기쁜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이라고 하니 구원파가 생각이 납니다. 세월호의 선장이 구원파의 교인이라고 합니다. 이 배의 실제 소유주가 유병언씨인데 이 사람은 구원파의 교주인 권신찬씨의 사위입니다. 구원파가 몇 개의 파로 나누어졌는데 유병언, 박옥수, 이요한 입니다.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구원파의 교리가 처음에 보면 복음적으로 보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전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단이란 항상 그 끝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구원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구원을 확신하게 하고 나면 모든 죄를 용서 받았기에 절대로 회개를 하면 안 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속죄를 받았기에 속죄에 대한 찬송도 부르면 안 됩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속죄의 찬송을 하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됩니다.


이런 교리로 세뇌되어 있는 자들은 수백 명을 죽여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 할 수가 없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결과 결국 구원의 확신 이후에는 장사나 해서 이익을 남기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고 배를 수입하여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배를 개조하였습니다. 정당한 안전조치들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부당하게 번 돈으로 교주의 일가들은 엄청난 축적을 합니다. 국내만 아니라 외국에도 엄청난 부동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구원파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지 한기총에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구원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욕함으로 자기를 차별화 시키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파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 언약대로 일하심을 증거 하면 이런 반응들이 나옵니다. 나 복음알고 믿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놀자고 나옵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12~15절입니다. “12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13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지 아니하는 나라에 대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 하나이까 14 그러므로 당신들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 15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


시드기야 왕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야 산다고 합니다.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을 예언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그 말을 왕과 백성들이 좋아하기에 너희와 거짓 예언하는 그들도 함께 몰아내어 멸망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과연 이 말씀을 예루살렘에 모인 6개국의 사신들과 시드기야 왕이 듣겠습니까? 결국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레미야의 말보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이 훨씬 더 달콤하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멸망으로 가는 문과 길은 넓은 것이며 생명으로 가는 문과 길은 좁은 것입니다.


16~22절입니다. “16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17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18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 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이 성에 남아 있는 기구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나니 20 이것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귀인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옮길 때에 가져가지 아니하였던 것이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2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 전합니다. 1~11절의 외국의 사신들에게 12~15절의 유다의 왕에게 말한 내용과 같습니다. 이미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전의 기구들 중에 들고 가기 쉬운 것들은 다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기구들이 바벨론에서 속히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헛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반대로 말합니다. 지금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겨우 남아있는 성전의 기구인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조차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멍에를 메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이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나중에 이 기둥과 물두멍이라고 하는 놋으로 만든 대야와 다른 기구들까지 다 부수어서 바벨론으로 들고 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과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다 여호와의 말씀인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라고 하였지만 그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하였기에 결국 나라가 망하고 성전까지 파괴되어 성전의 기구들까지 약탈이 되었지만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다시 되돌려 예루살렘 성전에 두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망치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멍에를 메게 됩니다. 구원이란 죄의 멍에를 벗는 것과 동시의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멍에를 벗고 자유 하는 것으로만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파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이며 복음을 말하는 교회들도 이 모양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줄에 묶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27~32절입니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29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픈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입을 티끌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내어주고 수욕으로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도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하고 뺨을 맞지 않으려 하고 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멍에를 메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와 사망의 멍에에 매인 자기 백성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자신이 죄와 사망아래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멍에를 다 메셨습니다.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온갖 조롱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멍에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는 멍에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멍에를 지려고 하지 않는 그 수치와 조롱과 저주의 멍에를 예수님께서 홀로 메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 이루심을 우리가 믿으면 이제 우리는 모든 멍에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강도 부도 다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 구원을 누리며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복음이 그런 말씀일까요?


마태복음 11:27~30절입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이 관계 속에 들어가는 자가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합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혼을 넘겨주신 자들이 계시를 받는 자들입니다. 계시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인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영인 성령이 임함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묶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라는 멍에를 지게 됩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멍에가 쉽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쉬운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나는 멍에를 벗어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그 멍에가 우리에게 메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고, 벗어버릴 수도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하고 짐이 가볍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어떤 멍에를 같이하였다고 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멍에를 함께 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이 들리고 믿어진다는 것은 이제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죄와 사망의 줄에 메어 있는 자들도 얼마든지 자유를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하여 함께 묶인 자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온 생애를 통하여 체험하게 됩니다. 그 자유란 바로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2:20~21절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줄이라고도 하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멍에를 메고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에 묶인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