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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6:14~21 때가 이르리니 2014. 1. 8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라서 악인과 의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러면 악인과 의인의 구별이 어떻게 됩니까? 악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바울 됨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여러 형편들이 좋아져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복음의 일꾼이 되어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심지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왜 그런 것이 은혜입니까? 주님만 의지하게 만들기에 은혜입니다. 


시편 104:24~29절입니다. “2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5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6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시면 바다의 리워야단도 떨게 됩니다. 리워야단은 바다의 괴물, 용, 뱀, 악어 등으로 번역하는 짐승도 주께서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것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그들이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행17:25). 이러한 은혜는 보편적으로 주시지만 자기 백성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란 징계입니다. 심판과 징계는 완전하게 버리지 않으셨다는 반증이 됩니다. 완전히 버리시면 징계도 심판도 하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로마서 1:21~25절입니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면 평생 우상숭배 하다가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5~8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가 사랑받는 증거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버린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에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14~15절입니다. 지난주에 본 바로 앞의 말씀에서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지도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서론을 길게 본 이유는 지금 보는 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날이 이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제목도 ‘날이 이르리니’입니다. 날이 이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경험 속에서 출애굽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10가지 재앙과 그 재앙 속에서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남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한 구원의 경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맹세를 다르게 하게 된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이 왜 출애굽보다 더 큰 여호와의 구원의 경험이 되는 것입니까? 규모면에서는 출애굽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 보다 훨씬 더 큽니다. 430년간 종살이 한 곳에서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 되는 대규모입니다. 남녀노소 다 합하면 적어도 2백만은 넘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합계가 느헤미야 7:66절에 보면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노비도 있었지만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에서 돌이켜 주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됩니까?


애굽에서는 야곱의 가족 70명이 들어가서 430년간 계속하여 인구가 불어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한 민족이 이루어져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그 민족을 키우십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출애굽 시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에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 심판이었는지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파괴되어 버리고 백성들도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16~18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어부가 낚시로 놓친 것들을 포수가 다 잡아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는 이유는 여호와의 눈이 그들의 모든 죄악을 다 살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여호와의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여호와의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에스겔 8:15~18절입니다.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서 8장 전체가 우상숭배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나하심으로 이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였습니다. 그 절망적인 모습을 에스겔 37장에서 바짝 마른 뼈다귀들만 가득한 모습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고 생기를 대언하니 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나는 것을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출애굽 보다 더 극한 절망의 상황에서 돌아왔기에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들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북방 땅에서 돌아오게 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사야 43:14~21절입니다.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출애굽과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비교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병마를 바다에 수장시키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사막에 강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출애굽에서 반석에서 물이 나왔는데 이제는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막에 들짐승들조차 여호와를 존경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올 때에 사막에 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막에서 물이란 생명수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돌아오는 것도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도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와서 이들은 온전한 생명을 누리며 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헛된 우상들을 섬기면서 그것들이 자신들을 살리는 줄 착각하며 살았기에 이들을 심판하시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셔서 주야로 우상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본 예레미야 16:13절의 말씀대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그 자리 그 세상이라는 바벨론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전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생명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도 성전에서도 생명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약 오백년이 지났습니다. 건물로 된 성전은 헤롯왕이 수리와 증축을 하여 화려하였지만 그 안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적의 소굴이 되어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때가 이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바벨론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되리라고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도 다시 때가 이르러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날이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은 이방인들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날입니다.


본문 19~21절입니다.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이 말을 누가 합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만이 아니라 땅 끝에 있는 민족들도 고백하게 되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거짓말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신 아닌 것으로 신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거짓된 것인지 알게 하시면서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심판을 하시지만 그러한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도 참된 하나님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주의 이름을 증거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손과 그 능력을 알려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을 통하여, 또 제2의 출애굽이라는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심을 통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십니다. 애굽과 바벨론이 다 세상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최종적인 출애굽을 이루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날이 이르러 일어날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때가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4:4~7절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실 것을 출애굽과 제 2의 출애굽이라는 바벨론포로에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9:28~36절입니다.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별세’라는 말이 ‘출애굽’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만 엑소도스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별세시키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하늘로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날이 이르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만유의 상속자, 세계를 지으신 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체의 형상,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심, 죄를 정결하게 하심,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심, 이 우편이란 장소적인 개념보다 구원자의 자리를 말씀합니다. 날이 이르러 이 모든 날의 마지막인 지금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