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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2:1~6 악한 자의 형통? 2013. 11. 6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악한 자가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내용과 그 답변을 오늘 본문으로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이런 질문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신정론이 생긴 이유는 이 세상에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공의로우신 신이 있다면 세상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신정론입니다. 일반적인 답변은 신은 악도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신은 의롭고 바르다는 말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 주는 의로우시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내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옳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의문이 나는 것들을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하나님의 공정성에 대하여 질문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배신자가 평안하게 사는 것입니까? 우리도 이러한 질문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문제 즉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의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이 없다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2절입니다. 계속하여 예레미야 선지자가 질문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셨기에 악인들이 뿌리는 내리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는데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마음은 멀다고 합니다. 악인들의 외식적인 행동들을 예레미야 자신이 봐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형통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이사야서에서 봅니다.

 

이사야 29:13~14절에서 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여기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된 것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데도 하나님께서 왜 악한 자가 형통하도록 버려두시느냐는 논쟁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러한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나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15:7~11절입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항의하였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외식(外飾)입니다. 이러한 외식이 나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사람의 가르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속에서는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데 이것을 사람이 해결 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입술로만 주께 가깝고 그 마음은 먼 자들을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입술로만 가깝다고 해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그런 일들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주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에 이것이 외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면서 양을 잡기 위하여 끌어냄 같이 그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여 달라고 합니다. 마치 아나돗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그 방식대로 악인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악인들로 인하여 온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며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이 땅이 나빠지고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림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이렇게 되는 것은 바로 악인들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기에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5~6절입니다. 예레미야의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고 합니다.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겠지만 요단강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려느냐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하는 일은 보행자와 달리는 정도이며 평안한 땅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말과 달리기를 해야 하며 요단강이 넘쳐나는 그런 힘들과의 싸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너의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라고 합니다. 부모형제라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예언을 듣기 싫어하여 예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하는 내용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악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평안한 것을 심판하여 달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도 탄식하시며 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 너머에 이방인까지 주께로 돌아오게 하실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선지자에게 답답한 고난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질문들을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욥기 9:21~23절입니다. “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욥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자 친구들이 찾아와서 공격합니다. 네가 무언가 죄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할 때에 자신은 그런 죄가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욥의 말에서도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항의가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서 이런 생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 것이냐고 항의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런 악인도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는 항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욥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에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거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의인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고자 하십니까? 욥의 고백을 보면 환난을 통하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뵙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편 73:1~3절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편 기자의 고민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민과 욥의 고민들이 공통점은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문제입니다.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이 어떠한지 4~14절을 봅니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악인은 만사형통인데 의인은 종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이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주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졸지에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결론을 내리는지 25~28절입니다. “봉독”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의 문제로 실족할 뻔하다가 이제 주의 뜻을 알고서는 하늘과 땅에서 사모할 분은 주님뿐임을 고백합니다.

 

하박국서 1:2~4절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도 악인의 형통과 의인에 대한 고난을 질문합니다. 또는 자신들이 악인이라고 하여도 어떻게 더 악한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느냐는 항의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봅니다.

 

하박국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나로 어떻게 대답하게 하실는지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니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선지자들의 고민이 오늘날도 계속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악인은 형통한데 의인이 고난을 받는 현실을 우리는 무수히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도대체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3:10~11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질문을 한 욥이나 시편 기자나 예레미야나 하박국 선지자도 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그 선악의 판단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선악의 판단을 하며 사는 그 자체가 이미 불의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악의 판단을 해결하는 유일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살게 되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악의 판단으로 살게 됩니다. 이런 기준이면 어느 누구도 심판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사는 이것이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