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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5~9 우시는 하나님 2013. 12. 11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난주 본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의 보좌와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간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간구한 내용보다 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신데 그 이름과 그 영광의 보좌와 그 언약을 말씀드려도 거절하시면서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6절에서 먼저 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펴시는 것은 적을 물리치실 때에 손을 펴서 물리치시는데 이제는 그 손을 자기 백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을 펴십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심판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고 많이 돌이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치실 리가 있겠습니까만 이런 표현을 하신 것은 이제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었다고 합니다. 키는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기구입니다. 키질을 하였다는 것은 심판을 집행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심판하시면서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백성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자기들이 가는 길에서 멈추고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주 본 14:13절을 봅니다.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확실한 평강을 보장하는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혼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돌이키라고 하였지만 절대 다수의 선지자들이 절기를 지키며 제물을 바치는 자들을 향하여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잘 가고 있다고 여기기에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하여 돌이킬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입니다.


미가 3:1~12절입니다.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거짓 선지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자들의 죄악도 이러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지 못하고 다 함께 멸망합니다. 이렇게 멸망하는 것은 이러한 지도자들의 말을 좋아하면서 따르는 자들이 절대다수로 많기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렘5:31).


8~9절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8 내가 대낮에 침략군을 끌어 들이리니, 팔팔한 젊은 군인들이 맞아 죽어 과부가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아지리라. 모두들 겁이 나서 갈팡질팡하도록 갑자기 덮치리라. 9 아들 일곱을 둔 어미가 아들을 모두 잃고 졸도하리라. 태양같이 믿던 아들을 어이없이 잃고 고개를 못 들게 되어 실성하리라.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는 원수의 칼에 맞아 죽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아내와 자녀들은 성읍에서 죽게 됩니다. 아들 일곱을 두었다는 아주 유복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까지 다 죽임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어김없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으로만 끝났다면 더 이상의 성경 기록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돌이켜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의 이름과 그 영광의 보좌와 그 언약을 언급하며 용서하여 달라고 하여도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성읍은 무너지고 예루살렘의 성전마저 파괴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기구들마저 약탈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불쌍히 여길 자가 없고 울어 줄자가 없고 평안을 물을 자가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위로하는 자가 곁에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멸망하는 데도 아무도 위로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우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에스겔 9:4~7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어지는 8~11절을 봅니다. “8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11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가 없었기에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도 누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거나 울어주거나 평안을 물어줄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며 울어주며 평안을 물어주는 것입니까?


이사야 59:15~21절입니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스스로 일어나서 일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본문 바로 앞의 말씀인 1~14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죄악이 어떠함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체로는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어떤 중재자도 나서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중재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내시면서 그 언약을 영원토록 세우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레미야의 간구를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것은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인간에게서는 정말 불가능함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인간의 중재자도 소용없음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사무엘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불쌍히 여기시고 우시고 화평을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9:35~38절입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에 목자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있었고 백성의 선생들이라 불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 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율법으로 정죄를 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1:32~34절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하는 말도 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에 대하여 이들의 해석은 예수님도 죽음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마르다 에게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부활과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믿지 못한 것이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에 절망하는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임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우심으로 인하여 이들에게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십니다. 이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평화의 주를 세상의 평화를 준다는 로마의 평화를 위하여 제거하여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라고 하며 주를 배척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유다마저 다시 로마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멸망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그 자신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불쌍히 여기심과 그의 우심과 그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화평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됩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기 백성에서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되어 성령이 임한 자들은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시는 소리를 말씀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로마서 8:22~30절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탄식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의롭게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완료되었다고 하십니다. 이미 완료하여 놓으시고 이 역사 속에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탄식하며 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없어질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기에 얼마나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우시고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의 그 용서와 은혜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불쌍히 여기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넘겨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