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5:20~31 마지막에는 어찌 하려느냐? 2013. 7. 10

 

20 2)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2)히, 너희) 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23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24 또 3)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3)히, 그들) 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26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3)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3)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29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오늘 말씀 제일 마지막 부분이 설교제목입니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이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면 그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는 하나님의 탄식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이 안타까움의 탄식이 왜 일어나는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절입니다. ‘너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너희’라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서 ‘너’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기에 단수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다 말하고 들어야 할 내용이입니다. 그래서 야곱 집에 선포하고 유다에 공포하라고 합니다. 야곱 집은 북 이스라엘을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유다가 있는 것으로 보면 북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이든 지금 남아있는 유다이든 또한 오늘 우리까지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들으라고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지난주일 낮에 본 에베소서 4장의 하나님을 떠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특징이 어리석고 지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능력 있는 자들도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들이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약자를 탈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자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22절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왜 선지자를 보내십니까? 그들이 청맹과니가 되었거나 귀머거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이들을 책망하시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막히고 귀가 막혀있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1~13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천사가 제단의 숯불로 그 입술에 지지면서 네 죄가 사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때에 주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소리에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사명이 이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보고 듣고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여야 하느냐고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 물으니 심판을 당하고 십분의 일이 남았을지라도 그 마저 잘리고 거룩한 그루터기만 남을 때 까지 라고 합니다. 그 거룩한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고 합니다. 거룩한 씨만 남기셔서 그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천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시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들으라고 하여도 결국 듣지 않았기에 유다마저 멸망을 당하는 것을 통하여 이들의 눈이 감겼고 귀가 막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보고 듣게 하여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눈이 보고 너희 귀로 듣기에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어떻게 보고 듣게 되는 것입니까? 기록된 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보고 듣게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보고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의 죄를 보기에 예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4:11~14절입니다. “봉독” 구약의 예를 들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을 보고 경계를 삼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우리의 마음의 생각까지 다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될 때에 우리에게 누가 있습니까? 큰 대제사장이시며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를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도리라는 말씀입니다.

 

22~23절입니다. 바다는 고대사회에서 엄청난 위협을 주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다조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욥기 38:8~11절입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사탄에게 자랑함으로 인하여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몸까지 병이 들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기를 죄가 있어서 이런 고난이 왔기에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네 시작이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이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욥이 하나님께 물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욥에게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그 운행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한 말씀이 방금 읽은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듣고서 욥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가 없는데 함부로 말을 하였다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여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유다는 배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렘17:9).

 

24~25절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며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와 아세라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신들이 비를 주고 농사를 잘 되게 한다는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추수기를 주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는 말이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들에게 올 좋은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 좋은 것을 막았다는 말씀은 심은 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다고 하셨기에 흉년이 들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어리석고 지각이 없게 되면 유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일하고 먹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이 굳어지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고 살게 됩니다. 자기를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의식주를 내가 책임지고 산다고 여깁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의 모습에도 같이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도 내 하기 나름이라고 여기듯이 하나님도 내 하기 나름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5~28절입니다.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인은 더욱 악한 자들을 말씀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마치 새 사냥꾼이 매복하여 지키며 덫을 놓아 새를 사냥하여 조롱에 가득하게 채우듯이 사람을 사냥한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새를 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새들을 유인하여 덫에 들어가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나 교묘하게 덫을 만들었는지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입들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속여서 번창하고 거부가 되고 살지고 윤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을 교묘하게 속여서 거부가 되고 살지고 윤택하게 된 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당연히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남을 속이든 세금을 포탈하든 분식회계를 하든 불법 상속과 증여를 하든지 간에 부자만 되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뒤에서는 욕을 할지언정 그 앞에서는 굽실거립니다. 세상이 그러하다고 하여도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어느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면 하나님을 잘 못 믿어서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니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이 부자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과 저주 선과 악을 바꾸어버린 것이 악과 동류가 된 것입니다.

 

28~29절을 보시면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산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누누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다가 하나님께서 긍휼로 구원하여 내셨기에 그 긍휼을 유지하는 장치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약자를 강탈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여호와께서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이 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30~31절입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무섭고 놀라운 일이란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겠느냐고 합니다. 거짓 예언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개인의 신수사로 재앙의 공포를 심어주면서 복채를 많이 내게 하는 사이비 점쟁이나 무당과 같은 짓을 합니다. 많이 바치면 복을 받고 바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선지자들과 함께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제사장은 섬기는 직분인데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것들을 백성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들려지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를 낮추고 종의 모습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은 사도도 아니라고 무시하면서 거짓 선생들이 와서 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칠지라도 용납한다고 합니다. 구약과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는지 잘 분별하셔서 그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주님의 탄식소리가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