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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13~18 과유불급(過猶不及) 2019. 5. 8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오늘이 어버이 날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부동의 선물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 케이크 이런 것이 아니랍니다. 꽃은 시들면 버려야 되기에 귀찮습니다. 책은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이런 것을 보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케이크는 건강에 좋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동의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고 현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돈의 그늘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의 그늘아래 살지 못하게 조치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돈의 그늘에서 살지 말고 지혜의 그늘에서 영원히 살라고 주님은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은 성경에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려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누가 능히 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우리가 계획한 일들이 고속도로처럼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정성을 바치는 것이 종교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뜻을 이루심으로 우리의 길이 굽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도록 버려두시면 심판입니다. 우리는 나의 뜻과 계획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사탕발림의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자기 이름의 영광성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14절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도서 3:11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언제 주어집니까? 나의 뜻대로 만사형통할 때가 아니라 나의 뜻대로 안 될 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예측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14절의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일이 잘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일이 잘되면 행복을 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일이 잘 풀려지는데도 내일 일이 잘 안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염려로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일 염려로 오를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내 뜻대로 안되어도 이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알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 모든 일들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18절을 새봅니다. “봉독 전도자가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모든 일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의롭게 살았지만 멸망하는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살았지만 장수하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고 지나치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고 합니까? 이것도 잡으며 저것도 잡으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는 중용(中庸)의 도()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과유불급입니다만 중용의 도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를 해야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지나치게 열심히 지켜서 율법의 의로 흠이 없을 정도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을 가지고 한 일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집사도 죽이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율법을 지나치게 열심히 지켜서 의인이 되려고 한 결과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은 율법을 문자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복음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가 복음의 증인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만 그가 유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율법의 의를 추구할 때에도 사울은 극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본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다 죽이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받아 전하면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전도서가 말하는 너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씀과 충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의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고 하는 그 일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막게 되기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음을 막으면 저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길은 저주로 가는 길이기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신교에서 구원은 은혜이지만 이 땅에서 받는 복과 하늘의 상급의 차이는 자기의 행함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이러한 다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만 바른 복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바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것이며 그 의를 성령을 통하여 넘겨주심으로 의롭게 되는 길이기에 인간의 공로로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어지는 11~14절입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며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기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더욱 열심을 다하였기에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며 멸하였다고 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지나치게 열심히 믿은 결과는 하나님의 의와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하여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3절입니다.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1)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갈라디아서 에서는 다른 복음 전하는 자를 저주 받으라고 하였는데 빌립보서는 개들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할례는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할례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신뢰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의 말씀을 본 이유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전한 이유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달려간 결과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 아래 가두는 것이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이런 복음을 들은 자들이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어야겠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은혜의 선포 앞에 반드시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5,6, 1).

 

이 복음이 증거 된 후로 약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안에도 동일한 싸움들이 있습니다. 말은 복음인데 율법주의로 나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말은 복음이라고 하면서도 오직 은혜를 말하는 자들이 있고 은혜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저도 복음에 대하여 조금 눈을 뜬 것이 25세 때입니다. 신앙이란 내가 열심히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히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약 30년 가까이 복음을 전한다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경이나 책이나 복음에 앞선 자들을 통하여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극단적인 싸움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마치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도처럼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다는 말을 합니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어제의 복음의 동지가 오늘 다른 복음 전하는 원수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거부하고 인간의 공로를 끼워 넣으려고 한다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맞기에 바울처럼 말해도 됩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의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그렇게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자유 한다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정죄하면서 자기들은 우상음식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둘다 하나님 경외의 모습이 아닙니다.

 

로마서 14:1~4절입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바울사도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직 복음으로 자유하지 못하여 음식을 먹는 문제나 날과 달과 절기에 대한 문제에 매인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저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주께서 받았는데 감히 네가 뭔데 비판하느냐고 합니다. 넘어지고 세워짐이 주님께 있는데 자신이 주가 된 것처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과유불급인 것입니다.

 

로마서 14:7~12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주를 경외하는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