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녹화 못함]

 

이사야 63:15-19 굽어 살피소서 2010. 9. 1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이사야서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된 본문은 오늘 이 본문이 거의 유일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이사야서의 고난 받은 종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은 없고 고난 받는 종이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는 내용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주께서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아 달라고 합니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에 있느냐고 호소합니다. 주께서 베푸신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무엇입니까? 63:7-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모든 자비와 사랑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에 베푸신 큰 은총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셔서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고 그의 사랑과 자비로 이스라엘은 드시고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기에 하나님이 돌이켜 치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지금 엄청난 환난 중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사랑과 자비에만 호소를 합니다.

 

11-14절입니다. 백성들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합니다. 모세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그들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애굽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심으로 출애굽이 일어납니다.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호소합니다. 출애굽과 홍해바다 건넘이 다 기적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주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상기하면서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그 어떤 우리의 의나 조건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것이 그들의 의가 하나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보다 430년이 앞선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이루어내신 결과물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것이기에 지금 비록 범죄 하여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다시 호소하는 것입니다.

 

15-19절입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아 달라고 합니다. 전에 베풀어주셨던 그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에 있느냐고 호소합니다. 지금은 주께서 베푸신 그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그쳤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즉 야곱이 모른다고 하고 인정하지 아니할 지라도 주는 우리의 아버지며 구속자가 되지 않습니까? 좀 뻔뻔한 느낌이 듭니다.

 

심지어 17절을 보시면 주의 길에서 떠난 것이 마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의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원수들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으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기도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간절히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이 땅의 형편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도 가지고 부도 가지고 있는 이런 때에 오히려 교회가 기도하는 내용들은 더욱더 많은 힘과 권세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를 의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추구한 것이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애굽의 힘이 좋아 보이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힘이 더 좋아보여서 그들의 신들을 수입하여 성전에 모셔다가 경배를 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현실을 봅시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큰 진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심이 더욱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때에 심판을 해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생자는 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은 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함으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간구하는 내용이 주의 강림을 간구합니다.

 

64:1-5절입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 원수가 이방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주의 원수며 이방나라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이 얼마나 두렵고 놀라운 사건인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그 모습니다. 출애굽 시에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강림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의 나라들도 주 앞에서 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주의 현현을 목격하였습니다. 이사야 6:1-5절입니다. “봉독” 주께서 높이 들리신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이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천사들이 여호와의 거룩함을 찬송합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그 화답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현현 앞에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을 간구하는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지금 강림하셔서 떨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64:5절을 봅니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태를 6-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 부정한 자 같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 같습니다. 다 잎사귀 같이 시들었기에 죄악의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간다고 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하기에 주의 강림을 간구합니다.

 

죄를 지어서 부정하게 되고 그들의 의라는 것은 더러운 옷과 같이 되었고 마른 잎사귀가 바람에 불려가듯이 죄악의 바람에 휘몰려 다는 상태입니다. 이러함에도 주의 강림을 간구하는 것은 무엇을 믿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주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약속의 땅에 들여 넣으신 것처럼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으니 주께서 강림하셔서 구원하여 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런 간구를 할 의로움이 없지만 그럼에도 간구하는 것은 주께서 아버지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러나가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다 소멸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앞의 말의 반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대로 버려두지 마시고 강림하셔서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는 사랑과 자비를 말합니다만 여기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제일 먼저 간구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범죄 하였어도 아버지이기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와 진흙으로 말합니다. 8-9절입니다. 우리가 다 주의 손으로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시오며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대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그래도 우리가 주의 손으로 만들어진 백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진흙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에서만 봅니다.

 

이사야 29:16절입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는 지음을 받지 않았다고 하거나 자기를 빚은 이에게 총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한 진흙인 이스라엘이라면 회개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주께서 만드신 진흙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흙임을 모르고 패역함이 심하면 심판을 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십니까? 이사야 30:14절입니다.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이사야 45:9절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진흙임을 아는 자가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과히 분노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10-12절입니다. 못난 진흙덩어리들이지만 그러나 주께서 빚으신 그릇들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고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 조상들이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모든 것이 다 황폐하였다고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지금 형편이 이러한데도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아직도 잠잠하시며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것으로 기도가 끝입니다.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다는 말씀이 없이 끝이 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응답이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 65:1절입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나를 구하지도 찾지도 부르지도 아니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6장에서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소명을 받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귀를 막고 눈을 가려서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냐고 물으니 이스라엘이 황폐하여 지고 나서 거룩한 그루터기만 남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거룩한 그루터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구하지도 찾지도 부르지도 아니한 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구하지도 찾지도 부르지도 아니하던 자들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일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잃어버린 아들들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 찾아내시는 방법은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진흙임을 압니다. 우리가 우리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빚어내시는 것을 알고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간구가 오늘 본문입니다. 주여 진흙덩어리에 과히 분노하지 마시고 돌보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