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역대하 33:10-13 므낫세의 기도 2010. 7. 14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므낫세의 기도가 열왕기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열왕기상하는 이스라엘의 남북왕조를 교차시키면서 역사적인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하는 바벨론포로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역사 중심적이기 보다는 성전중심의 기록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와 왕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열왕기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잘못들이 그대로 기록이 되는데 역대기는 그런 잘못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와 므낫세에 대하여서도 다른 면이 있습니다.

 

먼저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 지난주 보았습니다만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역대하 32:24절입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보시면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병이 고침을 받아 죽음에서 살아났는데도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의 치료와 모든 부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인데(27-29) 마치 자기의 공로인양 바벨론 사절단에게 과시한 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보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병이 낫고 나서 감사헌금을 듬뿍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31절을 봅니다. 바벨론의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십니다.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자기 능력을 과시는 교만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은혜답게 유지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에 대하여 봅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낫고 나서 3년에 낳은 아들이기에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 십이 세에 왕이 되어 55년을 다스립니다. 2-6절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 받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섬긴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목상을 여호와의 전에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악행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 이유는 7절에서 봅니다. 옛적에 하나님이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다윗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을 두어야 할 곳에 온갖 우상으로 가득하게 채웠으니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지극히 합당한일입니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이 므낫세의 꾐을 받아서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이런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책망을 하시는 이유는 역시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히 두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명령한 일들, 모세를 통하여 전한 모든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면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겨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역시 언약하신 대로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9:1-9절을 봅니다. “봉독”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난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화와의 이름을 영원히 성전에 두신다고 하십니다. 이름을 두신다는 것은 눈길과 마음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내 앞에서 행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방금 본문 7절에서 본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에게 이름을 두신다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다윗처럼 하지 않고 배반하여 다른 신을 섬기고 경배하면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던져버리겠다고 하십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십니다. 그들이 므낫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말씀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쇠사슬에 묶여서 다른 나라로 잡혀가는 이 환난을 당하면서 여호와 앞에 간구합니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집니다. 환난이 축복이 되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환난을 당하여도 끝까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악한 왕이라도 환난을 통하여 겸손하여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므낫세가 어느 정도로 악한 왕인가 하면 남쪽 유다가 결국 망합니다.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 왕이 엄청난 개혁을 하고 유월절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이런 개혁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그 회복된 신앙을 담고 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그 원인 중에 아주 중요한 하나를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열왕기하 24:1-4절입니다. “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므낫세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말씀합니다.

 

열왕기하 21:10-1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말갛게 씻어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죄는 비단 므낫세의 죄만이 아닙니다. 15절에 보시면 그들의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여호야김 시대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악의 화신처럼 여겨지든 므낫세가 환난을 당하여 쇠사슬에 묶여 감으로 인하여 회개합니다.

 

본문 33:13절입니다. 므낫세가 기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십니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 그때라고 겸손하여져서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5-6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여호와가 그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이름의 내용을 선포하시는데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시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십니다. 그러나 천대와 삼사 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진노는 잠깐이지만 자비와 은혜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조차 환난을 당하여 기도하니 들어주신 것입니다.

 

므낫세가 포로에서 돌아와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히스기야는 병에서 낫고 나서 자기의 부와 영광을 바벨론 사절단에게 과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14-17절을 봅니다. 성을 중건하고 모든 견고한 성에 지휘관을 두며 이방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과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제단들을 다 성 밖에 던지고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에 드리고 유다를 명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는 하였지만 그의 말년의 기록을 19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모든 죄악도 기록이 되었지만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도 기록인 된 것입니다.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하여 유다가 망하게 되었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하였지만 그가 환난을 당하면서 겸손하여지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므낫세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강도에게서도 봅니다. 마태복음 27: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강도들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는 것과 같이 욕을 합니다. 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원한다는 말이냐?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32절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예수를 욕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다르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3-43절을 봅니다. “봉독” 한 편 강도는 욕을 하는데 한편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둘 다 욕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왜 돌이키는 것입니까? 신학교 다닐 때에 성경주석을 숙제로 내면서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을 정하여 줍니다. 그런데 한 동기가 이 본문에 해당되어 주석을 다 조사해보았다고 하면서 왜 돌이키게 되었는지를 고통 중에 회개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극심한 고통이 주어지는데도 한 강도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과 환난이 주어져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한 강도는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인 것입니다. 사형을 받을 정도로 평생을 악을 행한 자인데 마지막 고통 중에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고통 중에 예수님의 말씀도 들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23:34절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게 행한다고 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자기 같은 죄인도 용서 받을 것으로 믿고서 주님의 나라에 임할 때에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하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므낫세와 강도를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우리가 므낫세나 강도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까? 므낫세보다 우상숭배를 덜하고 있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우리의 삶의 비중이 어디에 쏠려있습니까? 우리가 므낫세요 평생 강도로 살아온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의 기도도 들어주시고 강도의 기도도 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온 인류를 두 강도로 보는 것입니다. 한 편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자기 죄를 모르고서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처음에는 함께 욕을 했지만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작정된 자는 그 고통 중에 예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환난들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환난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옵니까? 회개가 나옵니까? 아마 전자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망이 끝까지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난 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