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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0:1-9 아굴의 두 가지 간구 2010. 8. 4

 

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경고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만 구하라고 하시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람들마다 계산하느라 분주할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구하게 될 것인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구하는 한 가지는 돈의 넉넉함일 것입니다. 우리들 삶의 다툼과 요란들의 대부분이 돈에 대한 문제입니다.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들로 연일 분주합니다. 그 돈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활동들이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도 사실은 힘을 빼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교회가 힘이 있으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합니다. 힘을 위한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천국 문을 가로막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거부 못하며 달려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아굴이 두 가지를 구하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네 가지인데 둘씩 하나로 묶으면 두 가지가 됩니다. 그 내용은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달라고 합니다. 혹 내가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할 까 두렵고 혹 가난하여 도둑질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 경외가 목적임을 보게 됩니다. 내가 부요하고 가난하고 하는 문제보다 하나님 우선입니다.

 

그러면 이 아굴은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까? 1절을 봅니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잠언(箴言)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참된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굴의 잠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담긴 것입니다. 그 지혜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혜가 없이 기도하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 외에 달리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아굴이 어떤 지혜를 받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2-3절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총명이 자기에게 없다고 합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입니다. 또한 그 거룩하신 분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런데 아굴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단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난 사람의 표현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면 죽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접촉만 되어도 나오는 고백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두렵고 떨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는 고백,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들이 주님을 만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세상에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아굴의 시대나 오늘이나 간에 과연 이런 질문들이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땅의 끝을 정하신 분이시라면 그 땅의 모든 것들의 끝도 다 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묻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평소에 하고 삽니까? 그 근원에 대한 질문들을 하지 않고 삽니다. 거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양 세상의 것을 누가 더 많이 소유하는가에 대한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황당한 질문을 욥기에서도 보게 됩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죄도 아닙니다. 얼마나 거룩하게 의롭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른 채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어버리고, 마누라는 그렇게 순전하게 섬긴 하나님을 욕이라도 하고 죽으라고 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심지어 자기 몸에 심한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으면서도 그 입으로 범죄 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경배를 하나님이 받으셔야 된다고 합니다.

 

그때 욥을 위로한다고 온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공격을 합니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갖 인과율과 자신들의 지혜를 가지고 욥을 공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에도 욥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따지고 싶다고 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38:4-6절입니다.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계속 되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보면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궁극적인 것들과 전혀 관심조차 없던 일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이 41장까지 계속됩니다.

 

타조에 대하여 생각 해 보셨습니까? 39:13-18절입니다. “봉독” 평소에 이런 타조에 대한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내가 동물학자도 아니고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러면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을 때에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욥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여도 평소에 생각지도 아니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여긴 일들에 대한 질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네가 의롭다고 나를 악하다고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때 욥의 답변을 봅니다. 40:4절입니다.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42:5-6절입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회개할 뿐입니다. 왜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자식이 한꺼번에 죽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자신의 몸이 병든 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합니다.

 

욥을 본 이유는 욥이 회개하는 모습과 아굴의 모습이 비슷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것을 간단하게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4절입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아굴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형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런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4절을 다시 봅니다. 두 곳의 말씀만 봅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자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3:12-13절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율법 선생이라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아굴의 질문의 답변은 예수님입니다. 또한 그 아들의 이름이 또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욥처럼 자기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욥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합니다. 욥만큼 의롭지도 못한 주제에 정말 어설픈 몇 가지의 자기 의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디에서 입을 막고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만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2:13-21절을 봅니다. “봉독” 어떤 사람이 유산문제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동생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기에 자기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거저 내 재산이나 챙겨주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래도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게 됩니다. 잠언 30:5-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방패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것이 거짓말 하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단지 계시록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요5:39)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그 안에 기도가 나오면 그 기도의 내용을 내가 이루고 싶은 욕망을 담아서 기도하여 응답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자기의 억울함조차 입을 닫고 오히려 회개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도대체 욥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렇게 티끌가운데 회개하였을까요? 자신은 의롭다고 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굴도 자기 평생에 기도하려는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겠는데 죽기 전에 거절하지 말고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아굴의 기도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달려가는 길이 사실 헛된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아니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헛되지 않다고 자꾸 거짓말을 하고 믿게 만듭니다. 마귀가 이렇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의미를 새롭게 둡니다. 내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은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에서 멀리하여 달랍니다.

 

두 번째는 너무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말고 거저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고 가난하여 도둑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까 두렵다고 합니다. 아굴에게 두려운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모르게 되는 것과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생에 이루고 싶은 기도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나옵니까? 이런 기도가 아니라 잠언 30:15절의 거머리의 두 딸처럼 달라고,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서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