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문제로 중간에 짤렸습니다]

역대상 4:9-10 야베스의 기도 2010. 8. 18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 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기도하면 한국의 교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노래까지 나오는 대단히 유명한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시들해 졌습니다. 마치 유행가 같습니다. 한때 인기가 반짝하였다가 사라져 가는 온갖 유행들처럼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도 한때 유행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기도에 그렇게 환호를 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수요저녁에 살펴본 기도의 내용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이런 기도는 왜 그리 인기가 많은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심지어 엄밀함을 요구하는 과학자라고 하여도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4대강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고위 공직자로 내정된 자들이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등에 대하여서도 사람들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자기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서 글자가 크고 뚜렷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 중에 하나가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다 복을 받기를 좋아하는데 그 복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것은 전에 성경이고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말은 없고 복을 주시려거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 아닌데도 왜 사람들이 열광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 본문의 책이 나왔고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들을 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이런 복을 원한 것입니다.

 

이런 열풍이 불었던 것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런 자료가 나왔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원래 달라스 신학교 교목으로 계신 리챠드 슘(Richard Seume) 박사가 달라스 신학교에서 말씀한 설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듣던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브루스 윌킨슨(Bruce H. Wilkinson)이라는 학생이 그것을 듣고 너무나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신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간직했고, 그 내용에 따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워커 스루더 바이블'(Walk Thru The Bible)을 통하여 세계에서 구약 세미나, 신약 세미나, 가르치는 자의 법칙 세미나 등 모든 세미나를 강연하고 계십니다. 그 브루스 윌킨슨(Bruce H. Wilkinson)이란 분이 드디어 책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미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기독교 서적이 일반서적을 넘어 베스트셀러 1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백만 권의 책이 미국에서 팔려나갔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적인 일반서적을 넘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비 기독교인들도 이 책을 많이 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세계를 강타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복을 좋아하는지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과연 이 역대상의 야베스의 기도를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들로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말씀과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이 마치 땅을 많이 차지한 부자처럼 되게 하여 달라는 것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자기 욕망의 안경으로 성경을 본 것입니다.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은 땅을 다 잃어버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땅을 다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까? 이사야 5:1-7절을 봅니다. “봉독” 포도원 노래입니다. 포도나무는 유다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완벽한 포도밭을 만들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맺힌 열매는 들 포도가 맺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바라셨는데 포학이며 공의를 바라셨는데 부르짖음만 가득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이사야 5:8-9절입니다. “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이것이 서울의 강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저주를 받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기에 가옥이 황폐하게 되어 거주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보고서 우리의 욕망대로 복에 복을 더하여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망하게 되는 길로 가게 해 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가 성경에 기록이 된 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땅을 회복을 소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이미 다윗 이전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야베스라는 지명과 인명이 나옵니다. 인명으로는 북 사마리아에서 살룸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스가랴를 죽이고 한 달 동안 왕이 되었다가 다시 반역에 의하여 죽임 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야베스는 남쪽 유다의 족보상에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다윗 이전의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호수아 때부터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시작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다 차지한 것은 다윗 왕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의 중심은 다윗과 솔로몬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가 기록이 된 것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처럼 그런 소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베스가 지경을 넓혀달라고 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고발하는 모습이나 오늘날 이 땅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동산의 확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서 땅을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일 낮에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품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분배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경계를 옮기는 것도 안 됩니다. 신명기 19:14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신27:17).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에서 복을 주시려면 자신의 지역을 넓혀 달라는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자신의 땅을 아직 차지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잃어버린 경우로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분배받은 땅을 아직 다 차지 못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약하고 또 적이 강하여 다 차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은 집안의 어려움으로 경작권을 팔았는데 아직 되찾지 못한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는 자신의 분배받은 땅을 회복하여 달라는 것이기에 정당한 기도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땅 외에 더 넓은 지역을 구한 것이라면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한 것이기에 들어주시지 않으셔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의 손으로 도우셔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땅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직 분배받은 땅을 다 차지 못하였거나 또는 자기 기업을 잃어버린 것은 큰 환난으로 인하여 땅을 팔아버린 것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환난이 왔는지 짐작이 됩니다. 나오미 에게는 보아스라는 기업 무를 자가 있었지만 야베스는 그런 사람도 없었기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임한 것입니다. 고엘도 없어서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는 참으로 소박한 기도입니다. 복을 주시려거든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복에 복을 더하여달라는 말을 가지고 땅에 땅을 더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욕망들이 이런 말씀에 눈이 번쩍하고 들어옵니다. 앞뒤 볼 것도 없이 이런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온갖 간증거리들을 찾아냅니다. 그러면 그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호응을 하는지 서로 장단이 맞습니다. 그리고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야베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가 수고롭게 낳았다고 합니다. 9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그의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에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고통’입니다. 얼마나 난산을 하였으면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아이를 낳을 때에 난산을 하는 경우에 그 어미가 자식의 이름을 그렇게 짓는 것은 라헬과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을 때에 난산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름을 베노니라고 합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베냐민으로 짓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도 해산 할 때가 가까이 왔을 때에 자기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소식과 시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을 듣고 아이를 낳으면서 죽기직전에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출생의 이름들을 보면 야베스의 출생도 그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을 하면서 낳았는지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런 야베스가 장성하여 살아가면서도 기업이 없고 환난을 당하였기에 기도하였습니다.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와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소박한 기도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기도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인기를 끓었다는 것은 그 안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많이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야베스의 기도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야베스가 유다 가문임을 보아야 합니다. 나중에 유다 가문에서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언약을 통하여 지경을 넓힌 것이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지경이지 그 이상의 지경을 계속하여 정복하여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서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였는지 또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라고 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구한 것이 마치 야베스의 기도를 오해하여 우리가 구하고자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 유다는 작은 나라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정말 야베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골로새서 3:1-6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하여 할 것을 그 본문만 보아도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구하는 것이며 환난에서 건져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완성으로 종말을 사는 오늘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야베스가 구한 지경이 과연 어디로 결론이 내려집니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야베스 기도의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