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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1:2~6 하나님의 안식 2014. 6. 4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6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지난주에 끝 날에는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 심판과 구원이 어떠한지를 다 보여주시는 자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회개와 심판의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의 영이 임하여 알려 줍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이렇게 책망 받아 나오는 자들이 주의 백성들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은 반드시 이렇게 이루어 내신다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기 의지를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하나님의 자기 뜻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 일하심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요6:29). 또한 주님을 섬기려고 한 마르다 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빼앗기지 아니할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0:42). 이러한 관점으로 2절을 다시 봅니다.


히브리어는 강조하는 단어가 문장 앞에 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 된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이 문장의 히브리어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는 은혜를 입었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기에 칼에서 벗어나서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 됩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은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라는 말이 믿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할 때에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입니다. 문장에서의 표현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표현들이 있지만 믿음 자체가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기에 행함과 대비되는 말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칼에서 벗어난 자들이란 바벨론의 공격과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과정을 생각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시고 광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들여놓습니다. 이처럼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상황을 광야로 봅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도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그 은혜가 어떠한지를 2절 하 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려고 가신다고 합니다. 그 때에 은혜를 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체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전혀 안식할 수가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을 얻게 하기위하여 가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단어 앞에 ‘1)’라는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그 각주를 보면 ‘히. 내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말로 ‘이스라엘’을 ‘내게’로 바꾸어 쓰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고쳐서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내게 안식을 얻게 하려 갈 때 에라’ 이런 문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려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안식을 얻게 하려고 가시는 길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봄 수련회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자기 집 만들기라는 내용은 하나님의 자기 안식을 목표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난주에 본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이루어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은 안식하신 분이시지만 그 안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천지창조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란 인간을 위한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안식을 목표로 한 창조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1~3절입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천지와 만물의 창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출애굽이 20장의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켜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광야 40년을 지난 후에 언약을 갱신하면서 율법 자체의 내용도 변합니다. 그 내용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억하고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노동금지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사람의 노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안식일에 일체의 노동을 금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1:43~45절입니다. “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도 여호와께서 그들에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일을 여호와께서 이루어내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남김이 없이 다 이루심이 이스라엘의 안식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안식입니다.


이사야 62:1~8절입니다.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다 이루시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칼에서 벗어난 자들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자신의 안식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하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가 다 이루지 못하면 늘 마음에 짐이 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다 해결하여야 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과 공간 안의 표현입니다만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따라 자신의 수고와 희생과 그 사랑을 근거로 완성하신 내용을 이 역사 속에 펼쳐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도록 파수꾼을 세워서 여호와로 쉬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묵시 속에 완성된 그 뜻이 이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의 완성이며 이것은 또한 자기 백성의 안식이기도 합니다. 이 일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5:15~18절입니다.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지만 자비는 전혀 없이 경쟁만 가득한 곳입니다. 병 고침을 받은 자가 누가 자신을 고쳐 주신지도 몰랐다가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쳐준 자가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긴 것이 신성모독죄라고 하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안식을 위하여 일하시는데 이러한 안식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버지가 하시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하시며 인자됨으로 인하여 심판의 권세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그 아들이 다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완성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안식이 자기 백성들에게도 안식이 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봅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옛적이란 이스라엘을 백성들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로 표현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만 알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한 개인인 ‘너’로 지목하여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것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시고 그 곳에서 다시 이끌어 내시면서 너에게 안식을 준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안식은 하나님의 자기 안식을 위한 것이기에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이러한 행위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자함으로 이끌었다고 하십니다. 그 인자함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 언약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까지 하지만 결국은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이끄신 것인가 하면 우리의 행위대로 버려두시면 우리는 결코 주님께로 돌이킬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으로 그의 인자하심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로 부릅니다. 이스라엘을 한 처녀로 부르십니다. 다시 네가 너를 세울 것이기에 네가 세움을 입으리라고 하십니다. 세우신다는 말씀은 이미 넘어진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조차 없는 상황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자를 다시 세우신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자기 안식을 위하여 그 영원하신 사랑으로 언약의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셔도 충분히 자족하시며 안식하시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언약하심으로 그 언약에 자신을 묶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물론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으며 그 아들이 또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는 것이 참된 안식이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유다서 24~25절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며 안식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생명을 얻고 영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4절에서 그렇게 세움을 입은 자들이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며 춤을 추는 것을 출애굽 이후에 홍해 바다 건너서 이렇게 춤을 춥니다. 또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도 이러한 춤을 춥니다. 두 사건 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러한 구원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것이 본문 5절입니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를 심고 심은 자가 그것을 딸 것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는 유다보다 훨씬 더 빨리 멸망한 북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마리아가 회복될 것을 말씀합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구원과 평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만약 죄를 범하면 적들이 와서 포도나무의 수확을 빼앗아 가거나 병충해로 인하여 수확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포도나무를 심고 그것을 심은 자가 수확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과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아직 미래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에브라임 산 위에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고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이 그림자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이란 새 언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의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11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ㄱ)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까지 안식에 대한 말씀들이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됩니다.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광야의 경험을 하겠지만 그 광야로 내 모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제 오늘 두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의사인데 대학생 때 의식화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의사 되는 공부보다 학생 운동을 열심히 하던 때에 소련이 붕괴됨으로 자신의 의식화 교육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온 사람에게는 월요일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소련이 무너졌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광야로 몰아내시고 그 광야에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 사람마다 그 방법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결국 그 영원한 사랑 안에서만 안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식의 완성은 하나님 자신의 안식이기에 이러한 안식은 실패가 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안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이어지는 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렇게 노출되어야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도 우리가 광야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안식에 들여놓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라는 그 십자가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위하여 그 십자가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