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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8:14~28    반복된 질문     2014. 10. 8  

14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15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16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 17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왕과 고관들과 백성들에게 줄기차게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모든 유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비록 죄를 범하여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용서하신 분이신데 왜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반복된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반복된 질문도 오늘 본문으로 끝이 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시드기야 왕 사이에 일어난 질문과 답변의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방적으로 시드기야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것도 있고(34:1~5),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기도요청을 하였을 때에 전한 여호와의 말씀도 있습니다(21:1~10, 37:1~10). 이런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시드기야 왕이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32:1~5). 그리고 은밀하게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뜻을 물어본 내용도 있습니다(37:16~21, 38:14~23).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질문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답변은 한결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반복된 질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8:14~18절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성전 셋째 문으로 불러서 한 마디도 숨기지 말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반복된 질문과 답을 통하여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왕에게 확인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대로 전하여도 왕이 나를 결코 죽이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왕이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의 살아계심으로 두고 맹세하면서 너를 죽이지도 않겠고 네 생명을 찾는 자들에게 넘기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맹세를 할 정도로 왕은 불안하고 다급합니다. 그러나 답변은 이미 정하여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대로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예루살렘 성도 보호하는 길이며 왕과 가족도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 답변에 대한 왕의 말을 봅니다. 

19~20절입니다. “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20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시드기야 왕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항복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항복을 하게 되면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항복을 하면 갈대아인들이 자기를 미리 항복한 유대인들에게 넘기면 그들이 자신을 조롱할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은 여호와의 말씀의 순종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질 것을 더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바벨론에 미리 항복한 자들이라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항복한 자들이라기보다는 나라의 위기 속에 자기 살길을 찾아서 강대국에 항복한 정치적 선택을 한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이들의 조롱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에게 물을 때에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시 전합니다. 

21~23절입니다. “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22 보라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 여자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항복을 거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이신 대로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에 남아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끌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들이 말할 내용은 시문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이러한 노래로 시드기야를 조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드기야의 친구들이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은 고관들입니다. 누가 과연 친구입니까? 거짓된 희망을 말하다가 정작 어려움을 당하자 모두가 물러가 버리는 그런 자들은 친구가 아닙니다. 참된 친구란 충직함으로 책망을 하는 친구입니다. 

잠언 27:6절과 9절입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이 기름과 향처럼 받아들여지는 자는 구원을 받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잠언서가 지혜를 말하기에 지혜를 전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아픈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거짓에서 난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아픈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예레미야에게 질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원하는 답을 얻을 수가 없어서 예레미야를 돌려보냅니다. 

24~27절입니다. “24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말을 어느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25 만일 고관들이 내가 너와 말하였다 함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씀한 것을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씀한 것을 전하라 하거든 26 그들에게 대답하되 내가 왕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다 하라 하니라 27 모든 고관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이 명령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 28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였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기에 예레미야를 감옥 뜰로 돌려보내면서 예레미야가 죽지 않을 방법을 알려줍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왕에게 무엇을 말하였느냐고 물어보면 나를 요나단의 집에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기에 왕에게 간청하였다고 하면 더 이상 추궁을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반복된 질문이 끝이 나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이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 까지 예레미야는 감옥 뜰에 있습니다. 

반복된 질문이 나오는 것은 여호와의 분명한 뜻이 전하여 졌지만 그 뜻이 나의 마음에 싫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내가 원하는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지자에게 계속하여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아주 간단합니다. 아버지여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이라는 이 길을 가지 않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는 것이 종교적인 기술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말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돌이켜 주신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개를 하게 되면 결국 구원이란 사람의 선택과 결정에 달린 것이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 항복하면 사는 것이라고 계속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가능성이 있기에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은 차라리 바벨론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에 대한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선악과 이후에 나타난 인간의 실상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나 여호와만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도 심판도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십니다. 그 이름의 영광이란 아들의 영광이며 그 아들의 영이 임한 자는 자기 이름의 영광이 죄임을 알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바벨론에 항복을 하는 것처럼 자기 부인의 일이기에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계속하여 반복된 질문을 통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답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신앙 상담 란에 공개적인 질문도 있고 비밀 글들도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정말 몰라서 묻는 것도 있지만 어떤 질문은 자기의 생각을 저 같은 사람에게서라도 확인받고 싶어서 하는 질문도 많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을 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다시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질문을 하려고 나섭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도 질문을 해 왔고 지금도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만 저의 질문에도 어김없이 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답을 다른 사람들의 책이나 설교를 통하여 발견하게 되면 참 기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과연 진리로 인한 기쁨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던 답을 찾았기 때문에 기쁨인지 돌아보면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과 답을 통하여서도 자기 죄를 보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반복된 질문을 하였지만 예레미야의 답변은 한결 같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눈치를 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왕에게 조금만 좋게 말해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단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훌륭하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그렇게 몰고 가기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죽기가 무서워서 시드기야 왕에게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확인 해 봅니다. 

예레미야 1:4~10절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능력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소명에 자신은 어린아이라서 말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이런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와 시드기야의 질문과 답변을 보면서 우리도 죽을 때 까지 자기가 얻고 싶은 답변을 얻기 위하여 무한반복의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그러한 우리의 욕망을 들추어내면서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자유게시판의 글과 댓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잠언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씀하셨다. 곧 지식이 깊어질수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당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하여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연구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겠다. 어릴 적부터 교회문턱을 드나들면서도 “나는 왜 이토록 무지한가?”라는 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나의 목 뒷덜미에 붙어서 근질거린다. 그리하여 금요성경공부만이라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에게 그 시간이 너무나 귀하고 좋았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는 체면 때문에 기초적 질문조차 민망하여 하지 못하는데 누군가가 내 대신 그 질문을 해주면 그것조차 좋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나는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저번과 똑같은 질문인 것 같은데 왜 또 하고 또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의 교만이고 거만함 인줄 몰랐다.
 
며칠 전 교회식구들과 먼 길을 다녀오다가 찻집에 들러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나는 “성경공부시간에 늘 반복되는 질문을 하기 보다는 목사님 말씀을 몇 편씩 들으면 답을 알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성경공부시간에 하게 된다” 라며 너무나도 가볍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솔직히 그 말을 꺼내면서 나는 얼마간 동조를 얻기를 바랐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요?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똑같은 반복을 하며 살고 있지 않던가요?” 
 
그 순간 나는 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뱉어 낸 그 말은 나의 거만함과 교만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내 심장으로 날아와 박혔던 것이다. 내가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이 하나님에 관한 정도(正道)를 알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어쩌면 지적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교묘한 몸짓은 아니었을까? 내 안에 어설프게 자리 잡고 있던 상식과 이론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에 관한 정도 보다 나를 솔깃하게 하는 그 무엇을 찾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공부는 했는데 그 지식은 어디로 다 날아갔단 말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쌓여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 아닌가.
 
그날 그분의 그 한마디로 나는 나의 죄악 깊숙한 바닥을 파고 또 파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그 생생한 손길로 떨었다. 나는 그 죄악 된 자리를 끝까지 고집하며 그 자리를 무한반복하고 있는 확인으로 떨었고 그런 나를 끝없이 기다리시는 그분의 은혜 앞에 머물며 울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날카로운 혀로 견책해 줄 친구를 준비해 주셨음에 감사했고 이 길 가는 동안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기뻤다. 나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동조해 주고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들만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얼마나 헤맬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다. 심비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 확인하고 확증해야 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으로 내 안에 깊어지길 소원하며 가는 이 길에 나를 견책하여 줄 동무들을 붙여 주심이 감사하다. 함께 지어져 가는 이 길이 그래서 좋고 견딜 만하다. 아! 모든 것이 은혜다.

여기에 제가 댓들을 달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제가 좀 아는 데요. 자기 자신을 보아도,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무한 반복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데,,,,,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온갖 밤송이와 고슴도치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 것은 이렇게 부서지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의 생각과 이론들을 부수시고 주님께 항복시켜 나가시는 일을 주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시고 계십니다(고후10:3~5). 우리의 생각과 이론들이 무너지고 주님께 온전히 항복하게 될 때에 항복하지 않은 세상은 심판입니다. 날마다 깨어지고 무너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함께 나누며 가는 자들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