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11~18   무엇을 믿습니까?    2014. 10. 22

1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3 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 15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앞에 이루리라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오늘 아침에 ‘전세 종말시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침 7시 30분 CBS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나온 말입니다. 금리가 저 금리가 되니 전세를 준 집주인들이 달세로 전환을 한다는 말입니다. 정부는 금리를 완화하여 세입자들이 집을 사게 하려고 한 정책이지만 세입자들이 집을 구입하는 시기보다 전세를 달세로 바꾸는 속도가 빠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전세를 살지 않는 분들은 이런 이야기가 별 의미 없이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인용한 이유는 종말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전세 종말시대가 왔다는 말에 전세 세입자는 불안한 소식이지만 자기 집이 있고 전세를 주고 사는 사람들은 기분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전세 세입자나 전세를 준 사람이나 간에 동일하게 두려운 소식은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지난주 예레미야 39:1~10절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함락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이란 제사장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며 절기를 지키고 온갖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멸망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46장부터 예루살렘 주변의 나라들도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 결국은 예루살렘을 망하게 한 바벨론마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온 세상의 멸망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아시는 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재건된 성전도 도적의 소굴이 되었기에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성전파괴도 세상의 종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께서 건물로 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질문합니다.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이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무너짐을 세상의 종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세상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계속 될 것이며 사랑이 식어지고 믿는 자들은 환난에 넘겨지며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고 저기 있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거짓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하고 저기 있다고 하여도 따라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어야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반드시 세상의 종말을 전제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나 그의 나라를 구하는 내용이나 간에 다 이 세상 나라의 영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그 시점부터 이미 세상은 종말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몸이 성전이시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를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건물 성전은 무너져야 당연합니다. 그래서 AD칠십년에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은 이미 이 세상은 종말이 되었음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종말의 영이기도 합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말세에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그 예언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은 이 세상의 끝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맞는지 아닌지 무엇으로 점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믿는다는 내용을 보면 압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을 믿는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말씀을 믿는지 점검해 봅시다. 

오늘본문은 두 단락입니다. 11~14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감옥 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는 내용이며 하나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15~18절의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의 구원내용입니다. 먼저 예레미야가 자유를 얻는 장면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정복한 왕이 자기 사령관에게 정복당한 나라의 한 사람을 선대하고 해하지 말고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의 예레미야 선지자 이야기를 정보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벨론 왕을 통하여 예레미야가 보호를 받는 것은 바벨론 왕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섬긴다는 여호와라는 신을 노엽게 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예레미야가 바벨론 왕과 그 군대에 의하여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바벨론 왕의 이런 마음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 때문입니다. 물론 바벨론 왕에게 이런 마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5~10절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소명을 받을 때에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함께 하여 구원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소명 시에 받은 그 말씀대로 예레미야가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와 왕국위에 예레미야를 세워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무슨 능력으로 이렇게 하겠습니까? 오직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넣어주신 그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다른 나라들도 멸망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예레미야서입니다. 그리고 그 망한 자리에서 새롭게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 건설하며 심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설되며 심어지는 자들은 오직 주의 영으로 인하여 왜 자신이 뽑혀야 되며 파괴당하여야 되며 파멸하고 넘어져야 되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말씀에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아직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 이름을 위한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람과는 정 반대의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니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온갖 저주와 위협과 박해만 오기에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왕에 의하여 예레미야를 옥에서 풀어내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자기 집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보호한 사람입니다. 그 아들 그다랴도 역시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인 인물이기에 그다랴를 통하여 예레미야는 자기 집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 15~18절은 38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한 것은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나오지 않는 이런 믿음이 나온 것은 그야 말로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벳멜렉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예레미야를 구한 그 가상한 용기로 인하여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왕궁도 헐고 자기 집도 헐어서 성벽을 더 튼튼하게 만들자고 하는 중에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예레미야를 죽이자는 일에는 동의하기 쉽지만 예레미야를 구하자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을 네가 나를 믿었음 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자리에서 구원을 얻는 예레미야와 이방인 에벳멜렉의 믿음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는 말로서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이며 환관인 에벳멜렉도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연상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의 사명이라면 갈렙은 이방 족속에서 편입되어 온 사람입니다. 이 갈렙이 헤브론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차지하였을 때에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합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은 여호와의 전투가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에 예레미야와 이방인 내시 에벳멜렉은 무너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을까요? 예레미야서에서만 왕과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믿은 것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사는지 점검하여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은 멸망으로 가는 길을 성공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이런 속임이 세상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교회로 모이게 되면 교회조차 멸망으로 가는 것들을 성공이라고 붙들게 됩니다. 

예레미야 5:17절입니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불이 되고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나무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바벨론이 쳐 들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와서는 유다 주민들이 먹는 것을 그들이 먹을 것이며 유다 주민들이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 마저 파멸되었습니다. 여호와와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견고한 성벽을 믿었기에 그것이 파멸 되었습니다. 

7:4, 8, 14절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잘못된 성전 신앙입니다. 평소에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전에 와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이런 거짓된 성전신앙을 고발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성전이라는 곳에 재물을 바치는 그런 종교적인 행위를 믿었습니다. 이런 성전이 도적이 소굴이기에 파괴되는 것입니다. 

13:22~25절입니다. “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스스로 고치기에 얼마나 불가능한 지를 구스인이 피부색을 바꾸는 것과 표범이 그 반점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이 시대나 간에 이러한 거짓된 것을 믿는 것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아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듣는 자도 세상의 욕망에 눈과 마음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17:1~11절입니다.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오늘 제목인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른 설명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워서 해석을 해야 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멸망의 길로 가는지 구원의 길로 가는지 이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시면 됩니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호와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라서 전적인 은혜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내가 나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그 속마음을 보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게 됩니다. 

46:25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바로 왕을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합니다. 바벨론에 강대국이 되어 공격을 해옵니다. 그러자 애굽의 바로 왕을 의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였습니다. 애굽이 유다를 자기 이익이 없는데 도와주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우리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목사들이 하나님보다 미국을 더 의지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주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시청광장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지지한다고 미국을 믿는다고 시청광장에 모이는 자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믿는 자들입니다. 

49:4절입니다. “패역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를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리요 하느냐” 이 말씀은 암몬 족속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암몬 조속을 향하여서도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패역한 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암몬을 멸망하신다는 말씀을 통하여 예루살렘이 왜 망했는지를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됩니다. 암몬이 믿은 것은 재물입니다. 재물을 쌓아두었기에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교회들도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독려하는 것의 결국이 무엇이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전도와 기도와 봉사를 독려하는 그 결국이 무엇으로 귀결됩니까? 돈 좀 내 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돈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더 많은 돈을 주신다는 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아서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만 잘못된 믿음을 간단히 살펴본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본문에서 이미 말씀드렸기에 간략하게 그 제목정도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믿는 것들의 내용들이 거의 다 나왔습니다. 예레미야서만 아니라 창세기로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은 믿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행하고 행하지 않을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믿을 것을 믿고 믿지 않을 것을 믿지 않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처럼 멸망당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그 멸망의 와중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믿음이나 에벳멜렉의 믿음이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보면 예레미야 39:8절에서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어떻게 구스인 내시에게 온 것인지 38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란 없는데 나오는 것이며 죽은 데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철저하게 자기의 행위가 아님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자기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5:9~11절입니다.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우리의 어떠한 신앙의 일이라고 할 때에 이런 고백이 나오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9:30~32절입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ㅋ)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로마서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에벳멜렉 같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예레미야를 구하였다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행한 그런 행위가 바로 은혜의 선물이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나 에벳멜렉은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분명히 바울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행위로 의를 쫓아간다고 여긴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어준다는 자기의 행위를 믿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거침돌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만이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부끄러움을 다 받아도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끄러운 십자가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찬송2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