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4:1~4 마음 가죽을 베고 2013. 6. 5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전도할 때에 어떻게 전도를 합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저런 복을 받는다는 말로 전도를 합니다. 그러한 복들 중에 물론 구원도 말하지만 구원이란 죽고 나서 좋은 데 가는 정도로 말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복을 받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전도란 지금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도를 받아들일 자는 거의 없지만 그러나 성경의 전도가 이러합니다.

 

시편 2편을 보시면 회개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입니다. 입 맞춘다는 말은 두려워 떨며 그 발 앞에 엎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칼을 갈고 계신다고 시편 7편에서 말씀합니다. 신약에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기에 찍어서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이 천국을 몰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죄인인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하고 급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롬1:18).

 

예레미야서 전체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거짓된 회개를 합니다. 거짓된 회개란 진심으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잠시 회개하는 모양을 냅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시늉이라고 해야만 자신이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서면 회개의 모양을 냅니다. 이렇게 하는 회개들은 결국 회개를 이용하여 자기의 악을 도모하기 위한 모습임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인생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야 회개하고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란 옛 언약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되는 것이며 새 언약으로 회개가 일어나는 자들은 주께로 돌아와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상우배가 참으로 헛된 일이라고 인정하며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알기에 수치와 치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가 일어난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용서하심 앞에 감읍(感泣)할 따름이지 다른 무엇을 요구할 틈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회개가 일어났습니까?

 

4:1~2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의 회개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계속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인데 그 돌아오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가증한 것이란 온갖 우상들을 말합니다. 우상이란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이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것들이 다 우상입니다. 나를 위하여 성전을 짓고 나를 위하여 헌금하고 나를 위하여 회개하는 것도 다 우상이 된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란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가증한 우상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우상을 마음에 품고 주께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만 주님이시지 실상의 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무엇을 해도 다 가증한 우상숭배의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가증한 것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와야 하며 돌아와서는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외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1명과의 대결에서 너희가 언제까지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겠느냐고 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바알이 우리의 하나님입니까?

 

청년회 시간에 청년들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제가 돈도 벌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면 다 나에게 줄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지금 돈을 벌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정말로 돈을 벌게 되면 그 마음이 어떨까요? 당연히 흔들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가증한 것을 버리고 돌아왔으면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뿐 아니라 더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께로 돌아오게 되면 세계의 만민들이 주님을 찬양할 것이며 그러면 주께서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며 출애굽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한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와서 흔들리지 않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살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의 내용을 제대로 이행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한 것입니까? 자신의 이름으로 언약하신 내용들이 파기가 된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주께서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제대로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의 죄가 어떠함을 다 드러내시면서 참된 회개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참된 회개란 가시덤불이 뒤덮인 묵은 밭을 기경하는 것이며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4:3절입니다. 1~2절은 이스라엘이라고 하시고 이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함께 말씀합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묵은 밭이 어떤지를 잘 압니다. 한해만 묵혀놓아도 그 땅은 뿌리가 튼튼한 잡초들로 뒤 덮여져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 잡초를 마른 땅일 때 빼 내면 잡초가 뜯어질지언정 뿌리 채 뽑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가 와서 땅이 좀 물러졌을 때에 잡초를 빼면 부드러운 흙을 뿌리가 몽땅 들고 일어나고 그 밑에는 생땅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얼마나 묵은 땅인지 가시덤불이 자라나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다년생입니다. 이런 밭은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바로 이러한 밭이 우리의 마음 상태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1~9절입니다. “봉독” 교인 수양회 때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이것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밭의 비유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밭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기경할 수가 없습니다. 묵을 땅을 무슨 수로 밭 자신이 기경을 하겠습니까? 길가와 같고 돌짝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은 밭을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갈아엎을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흔히 길가에 뿌린 것은 새가 먹어버렸다고 하는데 새를 마귀로 비유하여 설교를 많이 합니다. 설교시간에 졸면 말씀을 마귀가 빼앗아 가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졸지 않으면 빼앗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이 세상의 신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인한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생활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가 이런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은 농부가 책임을 지고 그런 밭들을 갈아엎으시고 좋은 밭을 만들어 씨를 심고야 말겠다는 씨 뿌리는 분의 의지를 보여주는 천국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돌아오는 것이 이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주께로 돌이켜 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덤불과 같은 묵은 밭을 갈아엎는 것을 마음의 할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4: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에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13년이 지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은 99세에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 후에 태어난 아이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태어나서 8일만에 다 할례를 받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다시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미 할례를 행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스스로 할례를 하라는 것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됩니다. 몸의 할례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 마음의 가죽을 어떻게 베어내는 것입니까? 이미 율법에서도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0:15~16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는 광야 40년을 지난 후에 언약을 갱신합니다. 이미 광야에서 목이 곧은 백성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30:6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주신다고 합니다. 물론 바로 앞에서는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면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것도 주님께서 돌이켜 주셔야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5:1~22절입니다. “봉독” 주께로 돌아가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예레미야는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면서 끝으로 주께서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 주셔야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가죽을 베는 일입니다. 주께서 마음의 가죽을 베어주시면 그제야 자신들은 주께로 돌이킬 능력도 없음을 알고 오직 주께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고 몸의 할례만 받은 자들이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주께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가시덤불이 된 밭을 기경할 수도 없고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도 없음을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응들이 둘로 나눠집니다. 회개하든지 돌로 치든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스데반에게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36~42절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의 가죽을 베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그 딱딱하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을 듣고서 이를 갈며 복음 전하는 자를 돌로 치는 자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7:49~53절입니다.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심으로 고소를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 집사도 성전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너희도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역한다고 합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였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들은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자들인데 그들을 죽이더니 드디어 그 의인이 오셨지만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았습니까? 마음의 할례와 목이 곧은 것을 신명기 10:16절에서도 함께 말씀하고 사도행전에서도 함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닙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자기 뜻을 이루어주지 않는 신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노가 일어나면 목 뒤가 뻣뻣하게 굳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분노가 일어나면 무슨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까? 목이 곧고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자임을 알고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4:4절입니다.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분노에 대한 말씀은 4:5절 이후에 계속됩니다. 이 말씀을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시간 이곳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 가죽이 베어지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