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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4:1~10 무화과 두 광주리 2014. 3. 26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의 고관들과 장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예레미야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여기서 여고냐는 열왕기하 24장의 여호야긴과 예레미야 22장의 고니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전에 먼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시는데 하나는 한 광주리는 처음 익은 것으로 보이는 극히 좋은 무화과가 담겨있었고 한 광주리를 나빠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극히 나쁜 무화과 광주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무엇을 보느냐고 하시자 보는 대로 대답을 합니다. 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면서 극히 좋은 무화과는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며 이들을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극히 나쁜 무화과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와 애굽으로 피난간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들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해도 바벨론에 끌려간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 받은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나 애굽으로 피난간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셔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대인들의 생각이나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풀리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거저 하나님의 대하드라마의 소품들이며 연출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보시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늘 자기중심으로 만사를 해석하기에 이렇게 보는 것도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런 배경을 열왕기하 24:10~17절에서 봅니다. “10 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 그의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의 왕 여덟째 해이라 13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 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된 것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판받아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셔야 하실 텐데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극히 좋은 무화과로 보아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란 비천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천한 자들은 쓸모없어서 남겨두었지만 이들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바벨론 왕에 의하여 왕으로 세워진 자가 시드기야입니다. 이처럼 일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겨진 자들과 애굽으로 피난 한 자들을 향하여 극히 악한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남겨진 자들이 좋은 무화과 입니까?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좋은 무화과 입니까? 무언가 남겨져야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남겨진 자들을 왜 악한 무화과로 보십니까? 이들이 남겨지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신들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보다 의롭기 때문에 남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로 인하여 다시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직도 깨어지지 아니한 자기의 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계획과 힘을 동원하여 무엇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4~7절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지만 이렇게 가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고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예레미야 1:10절의 예레미야 사역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이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아는 마음을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렇게 돌아온 자들은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좋은 무화과의 특징은 그들이 행한 것은 악을 행한 것뿐인데 포로로 잡혀가고, 돌아오고, 하나님을 마음을 아는 것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만 오롯이 담기는 자들이 극히 좋은 무화과입니다. 그러면 극히 나쁜 무화과는 어떤 자들입니까?


8~10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극히 나쁜 무화과는 시드기야 왕과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미 애굽으로 피난간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앞으로 애굽으로 피난가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여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들의 힘과 외국의 힘을 빌어서 자기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극히 악한 무화과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이미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이 모습들이 이러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만들어 그것을 생수처럼 믿고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극히 악한무화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벗어납니까?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존이 가장 우선이며 자신의 생존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자는 자신의 생존욕구와 영생에 대한 욕구마저 차압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을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과 그 해석과 그 실제가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계시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이 악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은 것이 자기들의 의가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힘으로 자구책을 구하며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들이 악한 무화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쁜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모든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약속의 땅에 심으신 후에 그들이 평안하게 사는 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물론 솔로몬 후반기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합니다만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 평강이 왔을 때에 세워진 왕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의 이름이 샬롬에서 온 이름입니다. 이때의 평화로운 모습을 열왕기상 4:25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그런데 이런 무화과나무 아래 평안히 살던 무화과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타락합니까?


호세아 9:9절입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난 포도 같이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셔서 선택하셨건만 이들이 행한 일은 바알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미가서 7:1~4절입니다.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이스라엘이 무화과 열매인데 극히 나빠져서 먹을 수 없게 된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이들을 심판하여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미가서 4:1~5절입니다. “1 끝 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이것은 열왕기서와 호세아서를 통하여 본 구원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을 의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오는 자들은 오직 주님 홀로 돌아오게 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마음에 여호와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비로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심을 봅니다.


요한복음 1:47~51절입니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냐고 하자 예수님은 빌립이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나온 것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렸지만 그 중심에 간사한 것이 없이 정말 메시야를 기다린 자가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더 놀라운 일을 볼 것인데 그것이 인자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본 내용을 예수님께 적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그 사닥다리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되는 극히 좋은 무화과들은 예수님만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입니다.


에스겔 48:13~14절입니다. “13 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 14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에스겔서에서 새로운 땅의 회복과 새로운 성전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예루살렘이라는 공간과 성전의 회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회복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수가 나옵니다. 그 땅에서 나온 처음 익은 열매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되시는 처음 익은 열매가 어떤 모습을 당합니까? 극히 나쁜 무화과가 당할 일을 다 당하십니다. 본문 9~10절을 보시면 환난, 부끄러움, 말거리, 조롱, 저주, 멸절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러한 저주를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3일 만에 다시 살리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령의 처음 익을 열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이 처음 익을 열매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이 주어집니다.


로마서 8:22~25절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예레미야서의 극히 좋은 무화과와 극히 나쁜 무화과를 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로 보았습니다. 극히 좋은 무화과가 돌아오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돌보셨기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대신 환난과 저주를 받아 멸절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는 이 땅에서 탄식하면서 주님의 날을 소망하며 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4:3~5절입니다.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새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은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이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로 자기 백성을 사셨다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계5:9). 이들이 바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께 드려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만 있다고 노래하는 자들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