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에스겔 48:30~35 여호와 삼마(1) 2013. 2. 27

 

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2011년 10월 26일에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라는 제목으로 에스겔 설교를 시작하여 오늘 그 마지막 부분입니다. 에스겔 첫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를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명기 28:36-37절입니다.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이어지는 47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저주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유효하게 적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하여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으시면 언약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저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계속하여 언약을 배반하는데도 이런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언약이 파기 되었기에 완전히 버리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울고 있는 내용도 함께 보겠습니다.

 

시편 137편을 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포로로 잡아온 자들이 자기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하는 슬픈 노래가 시편 137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를 보여주신 것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함을 보여주십니다.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마저 함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 33:21~22절입니다. "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22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성이 함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에스겔의 입이 열려서 다시는 잠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낙관론으로 희망을 가지고 있던 그들을 향하여 책망합니다.

 

이어지는 23~33절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이 망하는 지경에도 그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이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얻었는데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이 땅의 현실과 같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어려움을 당해도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교회가 이렇게 많으니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사는 땅을 심판하셔서 완전히 황무지가 되게 하심으로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30~33절입니다. “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마음은 이익을 따릅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도 이 모양인 것은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에스겔서 37장에서 바짝 마른 뼈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과 생기에 대한 대언으로 큰 군대로 일어서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임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대언하는 일만 한 것입니다. 그 대언도 시켜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결국에 여호와 삼마를 말씀합니다. 이런 내용은 에스겔서만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통하여서도 보여주시는 계시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3:8~10절입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서는 여호와께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냥 죽이시지 않으시고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기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기에 이들을 찾아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그 아들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큰 그림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보여주십니다. 부끄러워서 숨은 그들이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이들을 찾아오셔서 가죽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드셔서 함께 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노아의 경우를 봅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들이 늘어날수록 죄도 늘어나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죄악의 특징이란 사람들이 자기 좋은 대로 무엇이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모습이며 이런 모습이 그 마음과 생각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임을 이미 창세기에서 보여줍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이 방주가 언약궤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가 덮어지는 것입니다.

 

노아 이후로 흩어진 사람들 속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드시고 그와 함께 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5~8절입니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이루시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6:1~13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십니다. 그 이유는 7~8절입니다.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너희를 내 백성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백성들이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시고야 마십니다.

 

출애굽기 7:4절입니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애굽의 포로된 자들이나 바벨론의 포로 된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원하지 않아도 출애굽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 때문입니다. 출애굽 시키신 목적이 하나님의 처소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이며 이것이 여호와 삼마가 되는 것임을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보여줍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애굽이며 바벨론이며 율법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런 곳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하여야 할 곳은 주님 안입니다.

 

히브리서 13:8~15절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우리도 그 치욕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령을 통하여 믿고 말하는 것이 찬송의 제사이며 입술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