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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8:8-22 어긋맞게 한 축복 2009. 12. 30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12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야곱이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요셉이 그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아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 축복은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가 그 언약의 축복을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자식에게 복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야곱의 기도입니다. 야곱이 축복하는 기도는 그대로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언약을 받은 대로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손을 어긋맞게 하여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어긋나면 고치려 합니다. 어그러지지 않게 해야 일을 잘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손을 어긋맞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요셉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에 장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왼 손에 큰 아들 므낫세를 오른 손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향하게 하고서 야곱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먼 야곱이 침상에서 그대로 손만 뻗으면 야곱의 오른 손이 장남 므낫세에게 가고 왼 손은 차남 에브라임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손을 어긋나게 해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손을 바로 놓으려고 하자 야곱이 하는 말이 나도 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내가 실수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긋나게 축복을 하는 야곱을 요셉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압니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어 오셨는지를 그 마지막 축복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런 어긋나게 하는 축복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도 보이지 않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의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여 손을 어긋나게 하여 차자를 장자보다 더 나은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런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어긋나게 일을 하시는가?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일들이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곗돈을 넣었는데 곗돈 타기 한 달 전에 계주가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다들 주식으로 재미를 본다고 해서 주식에 투자를 하니 오히려 손해만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 것 같아서 만나 결혼하였는데 고생만 합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했더니 오락에 빠지고 친구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자꾸만 어긋나는 일을 만나면 사람들은 무당을 찾아가거나 점을 보거나 신을 찾아서 어긋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오늘 요셉의 두 아들에게 어긋나게 축복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 세상에서 볼 때에 어긋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낯설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잘못된 질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땅입니다. 하늘에서 반역이 일어나 그들이 패배하여 쫓겨난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모든 일이 형통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노력하고 소원하는 일이 어긋나지 않게 이루지는 것이 축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름 그대로 남의 발꿈치를 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의 노력으로 따 내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꾀와 지식을 다 동원하여 자기 축복을 챙기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도 속이고 아비도 속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자기가 이루어 내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얼마나 많이 어긋나게 됩니까? 이미 에서와 비교해 보았습니다만 에서는 그런 고생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어긋나는지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수일처럼 바라보면서 일해서 얻은 아내를 취하는 첫날밤에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가 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삼촌이 그 나라의 풍습을 이야기 하면서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7년을 더 일하라고 합니다. 야곱은 라헬만으로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이렇게 일이 꼬이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7년을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형제간에 자식을 서로 낳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고 그들의 시녀들도 이 일에 끼어들어 하루라도 잠잠한 날이 없었던 야곱입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겨우 형과 화해를 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딸이 강간을 당합니다. 장남이 서모를 건드리는 근친상간의 일이 일어납니다. 겨우 벧엘로 올라갔지만 여전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목축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요셉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아이의 옷이 피에 묻어 있었으니 이것은 짐승에게 잡아먹힌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랑하던 라헬이 낳은 아들입니다. 이런 슬픔으로 살아가는데 그 땅에 흉년까지 들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얻기 위하여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긋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왕에게 가서 오히려 바로 왕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애굽이 누구 덕분에 칠년 흉년에 살아남게 되는지를 야곱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너희에게 양식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너희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알기에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 온지 17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늙고 눈은 어둡고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으면서 야곱이 하는 축복이 어긋나게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야곱의 뜻을 어긋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어긋나게 하셔서 자신을 장애인으로 만들면서 까지 무엇을 의지하게 하시는가 하니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어긋나게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축복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축복하면 우리의 소원과 또 자식의 소원이 잘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히려 그런 소원들이 어긋나게 만들어 버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소원은 장자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요셉의 소원을 어긋나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소원을 어긋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소원이 야곱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을 일평생에 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소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과 정 반대로 가는 것이기에 그런 소원을 이루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소원을 어긋나게 하시고 환도뼈가 위골되게 하시고 자기 힘으로는 설 수도 없도록 장애인을 만들어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자신의 축복이 여부조의 축보보다 낫다고 합니다. 49:26절입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보다 낫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어긋나는 일을 당하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집스럽고 야망이 가득 찬 야곱을 계속하여 어긋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만을 남기시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사야 55:8-9절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그를 통하여 회개하고 약속을 붙들게 하여서 마침내 복을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이란 물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복 보다는 내가 원하는 복을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야곱처럼 자꾸만 어긋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인생에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축복인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그 어긋나는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여 가시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48:21절입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야곱 평생에 자기의 뜻과 어긋나는 삶을 통하여 배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즉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어긋나는 축복의 내용을 히브리서 11:21절을 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에 누구의 내용이 가장 길게 나옵니까? 야곱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 삶이 어긋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의 삶을 단 한 줄로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손을 어긋맞게 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침상에 앉아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후에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 얍복강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살면서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혼자 힘 있게 걸어가기를 얼마나 소원했을까요? 그러나 죽기까지 그 지팡이를 짚고 산 야곱이 오히려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한곳의 말씀만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내가 손해 본 것이 나중에 더 이익이 된다는 그런 세상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29절과 3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복으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소원과 어긋나게 하셔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