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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8:1~17 나무 멍에가 쇠 멍에로 2014. 4. 30


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후의 문제도 해결하고 싶어서 종교를 찾습니다. 종교(宗敎)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가장 근원적이고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풀어낼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취향에 따라 여러 종교에 귀의(歸依)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어떤 종교를 선택하여 나왔다면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기에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0:3~4절입니다.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를 위하여 즉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들이 우상입니다. 이것은 형상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론과 사상들도 마찬가지로 우상이 됩니다. 내가 믿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면 그 말이 사실이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왜곡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후에 이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잘 먹고 잘살기를 원하였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하신 때가 되어 출애굽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종교를 선택하거나 구원을 요청하여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중되는 고통으로 부르짖은 것은 단지 자기들의 몸이 편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중되는 고통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출애굽 시키시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러한 자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십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영원 전에 약속하신 내용들을 이루어내시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본 27장의 말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여러 개의 멍에와 줄을 만들어 목에 걸고 유다 나라에 온 사신들과 유다의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멍에를 멘 모습입니다. 이미 바벨론에 1차 2차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성전의 기구들도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남은 성전의 기구들조차 바벨론에 옮겨지기 전에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정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하나냐 선지자가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 버리고 성전의 기구들이 2년 안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습니까?


설교 초반에 종교라는 말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종교적인 요소들을 찾아내려면 문자적으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본 말씀이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앞뒤를 자르고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맡기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내 짐을 지라고 합니다. 내 멍에는 쉽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라고 하신 그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죽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짐을 맡기려고 주님을 찾았는데 주님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4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니라”


시드기야가 왕이 된 사년 다섯째 달에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분명히 거짓 선지자인데 성경은 거짓 선지자로 하지 않고 그냥 선지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하면서 분명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꺾으셨기에 바벨론에 옮겨진 성전의 기구들이 2년 안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하나냐 선지자의 이 예언은 지난주에 본 27장의 예레미야의 예언과 정 반대의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70년의 기한이 차야 하기에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라고 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예루살렘 성의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여호와의 계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지금까지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의 말과 달리 이미 1차 2차 포로로 잡혀가고 성전의 기구들이 바벨론에 옮겨진 상태인데도 여전히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 두 선지자의 말 중에 누구의 말이 참된 여호와의 말씀이 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자가 참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고는 죄 짓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온 땅에 우상이 가득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성전에까지 우상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의 저주를 받아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을 거짓된 희망으로 사람들을 좋게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36~37절입니다.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하나라도 어기면 이렇게 됩니다. 신명기 28장의 저주 중에 지극히 일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돌이 날아오더라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참된 선지자입니다.


갈라디아서 1:9~10절입니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과 참 복음의 구별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느냐 하나님께 좋게 하느냐는 하는 차이입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구분도 이와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평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참 선지자는 심판을 전합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 구약이나 신약이나 참된 주의 종과 거짓 된 종의 구별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그 귀가 가려져 있기에 자기의 사욕(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과 종교에 매여 허덕이다가 복음을 들으니 자유라고 하면서 이제는 모든 의무에서 해방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잘못 들은 모습니다. 복음은 분명히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제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좋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은 그동안 내가 내 것이라고 여긴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주인이 되어 다스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나의 것이라고 여겼기에 연보를 해도 내가 주인이 되어 결정합니다. 봉사를 해도 내가 주인이 되어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그런 결정마저도 다 차압하여 주님의 소유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들으셨다면 이제 나는 죽었다고 복창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리만 듣고자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5~6절입니다. “5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하니라 6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냐가 제사장들과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이 좋기에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아멘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자기의 마음도 빨리 포로에서 돌아오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야 예루살렘의 사람들 마음이고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7~9절입니다. “7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8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리라” 참된 선지자라면 그가 잔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율법에서도 말씀하였습니다.


신명기 18:18~22절입니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을 말씀합니다. 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호와께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선지자가 참된 선지자인가 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도 없으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시대를 봅니다. 누구의 말이 응하였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 다 이루어졌고 예루살렘의 평안을 말한 자들은 다 엉터리로 드러났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레미야보다 하나냐의 말이 매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을 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10~11절입니다. “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11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하나냐의 말을 받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이 그렇지 않다고 전합니다. 그러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아직도 메고 있는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리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처럼 2년 안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린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갑니다. 이 장면만 보면 이 순간은 하나냐가 이긴 것으로 보입니다.


12~17절입니다. “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하나냐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어 바벨론 왕을 섬기게 하였다고 하시면서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냐에게는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 것을 믿게 하였기에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고 전합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습니다. 하나냐 선지자가 거짓 예언한 때가 다섯째 달입니다. 그러므로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어 버리자 여호와께서 쇠 멍에를 메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말씀을 거짓된 희망으로 바꾸었기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메어준 멍에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누구에게가 자기 몫에 태인 멍에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한 번 더 봅니다.


예레미야 애가 3:27~32절입니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29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메우신 멍에를 잠잠히 메고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멍에를 속히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이런 저런 멍에들을 벗겨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멍에들 중에 무엇이 가장 힘든 멍에입니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관계입니다. 환경들은 수시로 바뀌어 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는 쉽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이렇게 모여들 있습니다만 교회에서도 여전히 어려운 인간관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면 해결이 됩니까? 나무 멍에를 꺾어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쇠 멍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아무도 못 말리는 권사가 한 사람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사람 중에 그 권사를 꼼짝하게도 못하는 자가 왔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사람의 매요 인생채찍입니다.


사무엘하 7:14~16절입니다.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인데 그가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를 하기는 하지만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하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자는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히12:8). 그러므로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어진 멍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지고 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벗어던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벗어버리고 꺾어버리면 오히려 쇠 멍에가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깨어지고 부수어져야 할 부분은 반드시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서로 짐을 지는 자리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갈라디아서 6:2~5절입니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각자가 자기의 짐을 지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짐을 지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란 짐을 서로 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가 성도에게 나타나는 것이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어떻게 손과 발이 따로 놀 수가 있겠습니까? 몸의 각 지체는 각자의 짐을 질 뿐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시편 68:18~19절입니다.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다윗의 시편입니다. 주께서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그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신약에서 봅니다.


에베소서 4:7~12절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의 말씀은 계속하여 하나를 말씀합니다.


나무 멍에를 메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였을 때에 쇠 멍에를 메게 하여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완전히 낮아진 자리에서 돌아와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낮아지시고 자기 백성들의 짐을 지신 것입니다. 그것도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 우리의 구원의 주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짐들을 벗어버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벗어버리는 짐들이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평가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께서 메어주신 그 십자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 멍에를 우리가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의 확증입니다(롬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