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집사님이 바쁘셔서 수요일 녹음을 못하였습니다)

스바냐 2:1-3 겸손을 구하라 2010. 11.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1절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기에 여호와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모이라고 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구하며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하지 아니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여호와를 의지한 자에게는 구원이지만 여호와를 배반한 자는 심판의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아모스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런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어떤 날이었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날입니다. 북은 앗수르에 남은 바벨론에 멸망하는 날들이 다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와의 날에 피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남은 자들인데 이들의 특징이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바냐 선지자는 지금 여호와께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 겸손은 가난한 자들과 연결이 됩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다른 것을 의지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물질적으로도 가난하지만 다른 신들도 의지 하지 않는 것을 가난하고 겸손한 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을 2절에서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이라고 합니다. 주의 명령이 시행되면 우리 인생의 날이라는 것이 겨와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시편 90:9-12절에서 봅니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주의 날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모여서 우리 인생의 어떠한지를 알도록 겸손하게 구하라고 합니다.

 

둘째와 셋째는 같은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여호와의 분노가 임하기 전이라고 합니다. 방금 본 시편 90:9절에서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11-12절은 이렇게 간구합니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누가 진노의 두려움을 알게 하셔서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평생이 하나님이 진노를 쌓고 있는지 아닌지를 지금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자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 스바냐 1장에서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무엇을 어떻게 심판하실 지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를 보려고 합니다. 스바냐1:1절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스바냐에서 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히스기야의 현손이니 왕족입니다. 왕족이라서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야 됩니다. 세습도 되지 않고 신분이나 지역이나 차별이 없이 여호와의 신이 임하면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 첫 부르짖음이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진멸의 대상이 3절부터 나옵니다. 왜 진멸하는지는 뒤에서 나옵니다. 우선 진멸의 대상이 되는 것부터 봅니다. 사람과 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죄는 사람이 짓습니다. 그런데 짐승이나 공중의 새나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는데 인간의 범죄로 그들까지 진멸이 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보아야 할 인간의 범죄로 다른 피조물도 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보다 더 엄중한 심판입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고기의 진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의 여호와의 날은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한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멸절하고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상들을 아울러 멸절한다고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멸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로 인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혼합종교를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도 맹세하고 말감이라는 우상에게도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더 섬기고 있습니까? 어제 부산 모임에게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 중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녀의 신앙문제에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말을 하며 등한시 합니다. 그런데 돈 버는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포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돈 벌기를 포기하지 않는데 정작 중요한 자녀의 신앙문제는 포기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신앙의 문제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혼합종교입니다.

 

6절을 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우리가 교회에 나온다고 여호와를 배반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이 여호와를 배반하는 것이며 따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기는 하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멸절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들 앞에서 참으로 회개할 것뿐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온 세상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을 모델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앗수르의 침략, 바벨론의 침략들이 여호와의 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온 세상은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심판할 자들을 구별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심판의 대상들이 지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상숭배 자들과, 여호와도 찾고 우상도 찾는 혼합주의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계속하여 심판 받을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8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방백들과 왕자들입니다. 우리가 다들 부러워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라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과 교류를 한 자들입니다. 이들도 잘난 자들입니다. 무역을 하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명품으로 치장한 자들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의 말에 의하면 멋쟁이 할머니가 부산의 화이트 폭스에서 옷을 사는데 270만원어치를 사더라고 합니다. 그 할머니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70이라고 하더랍니다.

 

9절입니다. “문지방이 닳게 넘나들며 속임수로 남을 등쳐 상전의 궁궐을 채우는 것들을 그 날 나는 벌하리라." 오늘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직금이 높아지고 월급을 많이 받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대 기업이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하청업자들 등쳐서 상전의 창고를 채운 자들이지 않습니까? 약한 자들을 짓밟으면서도 주인에게 충성하여 떨어지는 떡고물로 배불린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류 대학이라는 곳을 졸업하고 대 기업에 취직하여 직급이 올라가면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가족이 이렇게 되면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되면 배 아파 합니다. 우리가 다 우상숭배자입니다.

 

10-11절입니다. 그 날에 어문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입니다. 제 이 구역에서 울음소리가 날 것이며 작은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무너짐은 온 세상의 무너짐입니다. 막데스 주민들아 슬피 울라고 합니다. 막데스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예루살렘 지역입니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나안 백성을 장사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사하는 자들이 다 끊어졌기에 은을 거래하는 자들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무역이 끊어지면 돈 거래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이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또한 부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실감나는 여호와의 날은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파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한 모델일 뿐입니다. 장차 임할 여호와의 날은 온 우주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 날입니다. 그러므로 11절의 부르짖은 소리를 계시록의 바벨론 멸망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날은 단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할 멸망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 때가 단축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 때가 어느 때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날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씀을 전하지도 않는 시대입니다. 계속하여 비전을 말하고 번성을 말하고 성공과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면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등불로 두루 찾아서 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13절에서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며 집을 지어도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자기의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씁니까? 프리 빌리지 사는 집사님이 말하는데 1억 5천의 전세가 2년 만에 2억 2천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를 쓰서 그 집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그 집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릴 자기들의 집을 위하여 그렇게 애를 쓰면서 우리가 영원히 거처하여야 할 주님의 집에 대하여서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14-17절이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봉독” 이런 엄청난 심판이 임하는 것은 17절에서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범죄 하였다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살길을 따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그것이 은과 금입니다. 그러나 그 은과 금도 그들을 건지지 못합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질 것이니 이 땅 모든 거민이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 할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질투 하시겠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살길을 마련한 금과 은, 종교적으로는 자기들의 의를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마련해 놓은 것(롬10:1-3), 참된 생명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 물을 저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신데 거룩하지 못한 것이 모두 소멸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구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서만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를 또한 증거 합니다(히10:26-29). 그러므로 겸손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