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6:9-13 아버지의 뜻 2010. 12. 29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오늘 일용할 양식에 대한 말씀을 보려고 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한 번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아버지의 뜻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책을 보는 것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늘리고 또 재미와 감동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책으로 되어 있으니 이 성경책도 그렇게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에 대한 것도 알고, 죄가 무엇인지 속죄가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내세가 무엇인지 알아서 한번 유익하게 사용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모든 인간의 속성입니다.

 

 성경을 처음 읽어보는 사람이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나는 부인되어져야 하고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기도를 하여도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본능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대인들입니다. 다른 민족은 아무도 하나님의 계시를 이렇게 직접 받은 나라가 없는데 자기들만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기들만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주의 이름으로 일한 자들인데 왜 불법을 행한 자가 됩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선 마태복음 25:31-46절을 보시면 마지막 심판 때에 오른 편에 양을 왼편에 염소로 분류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갈 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합니다. 오른편에 선 자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자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라도 그것이 은혜라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전혀 반대의 평가를 하십니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결국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이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만 아들의 영광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큰 권세를 행한 자들이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겠지만 그 속으로는 자기의 영광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개척교회로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만은 교회들이 다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 있다는 일들도 할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웠다는 조용기 목사가 경남에 와서 한 집회의 내용을 요약하여 신문에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은 치유와 축복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치고 축복을 받게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보자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게 됩니까? 교회성장의 비결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하신 것입니까? 그 당시 성전의 부흥과 발전과 성장을 이야기하셨다면 대단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이란 하늘의 모형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성전이심을 보여주는 그림자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그림자를 붙들기 위하여 실체를 버린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고 한 유대인들이 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란 아들과 성령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1-16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전도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하였답니다.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가는 어떻게 구별이 됩니까? 사람들이 싫다고 버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증거 하는데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여 그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혜에 믿음이 세워지기에 결국은 무너질 것이며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6-8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인데 만세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정하신 것입니다. 이 지혜를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로 나타날 줄을 그 어느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 통달합니다. 사람의 일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영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지 세상의 영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1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는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사도가 주의 영을 받아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만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1:25-27절입니다. “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이 소원대로 계시를 주시는 자만이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다 이루심의 의의 선물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는데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아버지의 뜻을 예언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12절입니다. “봉독”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지만 믿고 기뻐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말하면서 썩을 것을 바란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병이 고침 받아도 죽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어도 죽습니다.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증거 한 책이 구약이며 이 구약은 그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예언이며 신약은 그 아버지의 뜻이 이렇게 드러났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은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하신 것을 이렇게 다 이루어내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느 한 부분도 우리의 뜻이 개입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시면서 이루어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다 이루어내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식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봉독”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처음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10:5-1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루마리 책에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시편40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오신 분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신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을 통하여서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을 빌립보서 2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그분을 믿고 무릎을 꿇으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자들이 그 앞에서 복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5:12-14절입니다.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10:7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1:15-19절입니다. “봉독”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된 상황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지금 그 아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시다는 것이 시편 2편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거부가 되어 다윗을 무시한 나발이 아니라 다윗 앞에 급히 무릎을 꿇은 아비가일처럼 지금 주님이 심판과 구원의 주로 오고 계심을 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