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6:9-13 일용할 양식 2011. 1. 1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오늘 볼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동안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원한 기도인데 이제부터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입니다. 십계명도 보면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아버지에 관한 내용이고 그 다음은 사람에 관한 내용입니다. 십계명이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이나 큰 내용으로는 같다는 말입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예수님의 기도의 완성이 됩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고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친 내용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구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에게서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옥을 보게 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이 말씀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도 결국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의 첫째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약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이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유엔에서 일한 적이 있는 ‘장 지글러’라는 사람이 조사를 하였습니다. 지구에서 120억 명이 먹고 남을 양식이 생산이 되지만 하루에 10만 명, 5초에 한명의 어린이가 굶어죽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갈까요?

 

세계의 부가 누구의 손에 의하여 재편이 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평화기구 설립에 20억 달러, 난민 정착 50억 달러, 영양실조와 기아퇴치에 190억 달러, 가난한 나라 부채 탕감에 300억 달러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 합하면 560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 군비지출액이 년 간 7.800억 달러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금액의 10배가 넘은 금액이 전쟁을 위한 비용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대한민국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도 남북한과 강대국들의 탐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은 일이 지금 지구상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루소라는 사람이 인간불평등의 기원에 대하여 논문을 썼는데 그 이유를 사유재산의 성립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유재산이 언제부터 성립하였는지는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근거를 설정할 수가 없고 여러 가지 추정을 하지만 지만 성경에서 보면 이미 아담의 범죄이후에 사유재산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는 사유재산이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나서는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에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어떻게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며 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가인부터 자기를 보호할 성을 쌓고서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읍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자기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부터 모든 인간은 자기의 소유를 확보하여 지키고 더욱 축적하면서 살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의 삶에서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십니다. 자기의 소유와 소유의 근거지를 포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재산도 가지고 짐승 떼도 데리고 떠나지만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시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잠시 있다가 지나갈 이 땅에 자기의 소유를 축적하여 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 개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로도 이런 나그네와 외국인의 경험을 하는 곳이 광야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데 가는 길이 광야입니다.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40년 동안 주리며 낮추게 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훈련을 만나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15-35절에 보시면 만나를 내려주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그 말이 ‘만나’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준 양식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 한 오멜씩, 약 2리터씩 거두게 합니다. 17-18절을 보시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게 한 사람당 한 오멜씩 즉 각 사람의 하루 분량이 된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말하기를 내일아침 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을 보시면 남겨둡니다. 그 결과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내일 양식은 내일 주실 것을 믿었다면 남겨둘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런 믿음이 없으니 모세가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도 또 하나의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 전에는 2일 분량을 거두어 안식일에 거두러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거두러 간 사람도 있습니다. 2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합니다. 결국 만나 사건을 통하여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그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만나에 대하여 신약에서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1-15절을 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기쁨으로 연보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한 것입니다. 이 은혜를 고린도교회도 성취하라고 합니다. 이런 연보의 정신에 나타난 은혜가 9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낮고 가난한 자로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부요에 참여시키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만나사건과 연결을 시키는지 13-15절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균등하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나 사건에서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15절을 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만나의 사건이 연보의 정신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증거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올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온 것은 표적을 보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먹고 배가 불러서 따라온다고 하시면서 그런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 썩지 않는 양식이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모세 때에 내린 만나를 먹고도 그들이 죽었지만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 다는 것에 대하여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밥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밥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과 노아와 맺은 언약의 계속으로 인하여 심고 거두게 됩니다. 물론 이런 모든 언약의 완성이 예수님이시기에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숨 쉬고 일하고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밥을 독점하여 굶어죽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밥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밥이란 단지 일용할 양식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이 됩니다. 우리의 소유가 우리를 살린다고 여기고 사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하여서도 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 사건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연결시키시며 바울사도도 만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영생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부자란 소유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도라면 이 땅에서 부자가 될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보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보면 연보란 평균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은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모습이 나옵니까? 우리 교회도 우리보다 가난한 교회와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거저 몇 곳에 선교헌금 조금 하는 정도로 생색만 내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합니다.

 

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2:13-15절을 봅니다. “봉독”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합니다. 정당한 요구처럼 보이는데 왜 탐심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그것 없다고 밥을 굶을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유산에 탐을 내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일수록 더하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유산도 없으니 탐낼 것도 없습니다. 그 유산으로 더욱 넉넉해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6-21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소유의 넉넉함이 자기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내 영혼이 무엇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죽을 때 사라질 소유로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평생 우리를 살리지도 못할 소유의 축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나옵니다.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령의 충만 입니다. 이런 은혜를 구하시면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사는 사람이 은혜의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구하실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