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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4:8-16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2010. 1. 13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지난주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은 소리가 하늘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을 돌보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돌보심의 결과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게 되는 과정이 나온 것은 시편 105편을 통하여 살펴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셨기에 부르짖게 되고 출애굽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왜 부르짖느냐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부르짖는 내용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난주에 보았던 부르짖는 소리가 나오게 하신 것을 통하여 출애굽을 시키시는데 오늘 부르짖음은 왜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하신 것인데 부르짖는 일을 가지고 책망하시는 방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부르짖는다고 그것이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는 내용 중에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출애굽기 12:29-30절입니다. “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만든 애굽의 모든 자들이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도록 강제노역을 시킨 애굽 사람들이 부르짖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환경을 조성하여 놓으시고서는 왜 애굽의 장자들을 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항의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항의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시기에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신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하기에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것은 이미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보여주셨고 그들의 제사장들도 인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재앙의 선포와 그 응답이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믿은 사람들은 미리 재앙을 피하였습니다. 출애굽기 9:20-21절을 봅니다. “20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21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바로의 신하 중에도 우박 재앙을 피한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자들은 그대로 두었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장자의 죽임을 당한 자들이 슬픔의 부르짖는 소리가 애굽의 하늘을 뒤덮은 것입니다. 이 부르짖는 소리는 심판을 당하고서 부르짖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상적인 힘과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다가 심판을 당하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표가 무엇인가 하면 신앙으로 인한 박해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과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 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표도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를 핍박한 자들, 즉 하나님을 모르고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멸망의 형벌이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슬피 울며 영원히 부르짖을 것입니다.

 

둘째로 불신앙의 부르짖음입니다. 전형적인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0가지 재앙을 자기 눈으로 목격하고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함에도 홍해 바다 앞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뒤에 추격하여 오는 바로왕의 병거를 인하여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의 내용은 곧 모세를 향한 원망인데 이것이 여호와께 부르짖은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왜 출애굽을 하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내는 일에 여호와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독일성서 해설에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내는 일은 출애굽기 3: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신 여호와뿐이시고 이스라엘 스스로는 그 일에 이바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스스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협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거저 이들은 자기들의 생존만을 염려하며 부르짖을 뿐입니다.

 

15절을 봅니다. 모세에게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고 합니다. 모세는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부르짖느냐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고 하시면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처럼 행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망의 부르짖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이런 불신앙적인 부르짖음을 모세오경에서만 몇 곳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5:22-27절을 봅니다. “봉독” 홍해를 건넌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만났지만 마실 수가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원망합니다. 이런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왜 출애굽 시켜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는 원망입니다. 이때 모세가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된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율례와 규례를 세우시면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애굽의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불신앙적인 부르짖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모습입니다. 양식이 없다고 부르짖고, 양식을 주시니 만나만 먹어서 질린다고 부르짖고, 길이 좋지 않다고 부르짖고, 이들의 불평과 원망들과 부르짖는 일들은 늘 불신앙적인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 결국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은 이런 불신앙적인 부르짖음이 아닙니까?

 

오늘도 수많은 교회들이 기도회를 합니다. 수요기도회만으로도 부족하여 금요철야까지 합니다. 원래 금요철야기도회라는 것이 한국교회에 없었습니다. 물론 새벽기도회도 한국교회에만 있는 현상입니다만 왜 전교회들이 금요철야기도회까지 도입하였는가 하면 오순절계통의 교회들이 금요철야기도회를 하면서 방언을 받았다느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장로교 쪽에서도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으로 면서 몰려가니 다른 교회들도 그런 기도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르짖음의 기도의 내용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부르짖은 내용과 다를 바 없는 것들입니다.

 

그 부르짖음의 기도라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자기 욕심을 차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복권이야기를 하였더니 점심시간에 최현주 집사님이지금도 복권 사놓고 당첨되면 절반을 헌금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연말 연예인들의 시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런 것과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른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을 받으면 영광이고 상을 받지 못하면 영광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 아들의 영광인데 도대체 무엇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오늘도 부르짖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요기도회 기도하려고 모였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기도할 것이 점점 없어집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도하여 온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기도 밖에는 없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출애굽기 32:1절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불러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우상입니다. 출애굽기 20:1-4절을 봅니다. 1-2절이 십계명의 서론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면서 그 첫째의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란 4절에서 너를 위한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를 위한 신이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의 내용이 나를 위한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과 같은 우상숭배적인 부르짖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중보자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부르짖음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멸하려고 하십니다(출32:10). 모세가 자기 생명을 걸고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출애굽기 32:30-35절입니다. “봉독” 모세의 중보로 이들이 진멸하지 아니하고 또 친히 함께 가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34장에 나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란 불신앙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중보로 다시 용서를 받습니다. 이런 모세의 중보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많은 불신앙의 부르짖음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중보와 성령의 탄식이 있는 성도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실감이 나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6:20-26절입니다. “봉독” 지금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있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종말의 현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부르짖음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것입니까? 주님의 뜻을 위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