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8:7~13   내시 구스인의 믿음     2014. 10. 1

7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10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12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여러 가지 학습을 하면서 자랍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무엇이든지 내가 노력하는 만큼 내가 소유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지식도 되고 경험도 되고 재물도 됩니다. 이런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다보니 성경의 믿음이라는 것도 나의 노력여하에 따라 소유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난주 노회의 고시를 하면서 식사시간에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은 무언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같은 시찰의 어느 목사와 탁구를 쳤는데 한 게임도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시간씩 거의 매일 연습하여 어느 정도 승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무언가 하면 끝을 보는데 목회는 안 되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6년을 철야를 했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히려 부흥이 안 되고 몸만 상해서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목회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사람의 신념(信念)을 말합니다. 신념이란 사전적으로 ‘굳게 믿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글자의 뜻을 풀어보면 ‘믿을 신’자에 ‘생각할 념’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란 자신의 환경과 학습과 이 세상의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先)이해된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성경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내용들을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성경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많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들을 나의 선 이해된 믿음이라는 단어로 해석을 하고 있기에 은사주의자들이 병을 고쳐준다고 하면서 네 믿음대로 된다고 하면 자기 책임은 없는 것입니다. 고침을 못 받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 없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최초의 믿음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을 보아야합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이 사람들을 만들어간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런지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로마서 4장에서 율법과 대비하여 아주 선명하게 증거 하고 있는 곳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4:13~18절입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에베소서 2:8절에서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면서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믿음은 이처럼 일관성 있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개념으로 보면 어떤 곳은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말하는 것 같고 어떤 곳은 자기가 믿어주는 행위로 믿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준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혀 없는데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런 믿음의 결과로 인하여 백세가 되어도 그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자기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이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기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의 세계에서는 어떤 인간도 자기의 육체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서 나온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시이며 구스인인 에벳멜렉의 믿음에 대한 내용을 보기 위하여 이렇게 서론이 길었습니다. 유다의 고위 관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하는 일에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예레미야를 내어 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시이며 구스인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하여 냅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예레미야 38:1~6절을 보시면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한 이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심을 다 없애버리는 민족의 반역자이기에 이런 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고 하여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압박에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예레미야를 죽이도록 내어주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를 구원하는 자가 나옵니다. 

본문 7절에 보시면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왕궁의 내시가 되었습니다. 전에 성경에는 환관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왕궁에서 일을 보는 남자들은 거세를 합니다. 왕의 여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거세를 합니다. 이런 자들은 남자의 욕망이 거세가 되었기에 다른 것으로 대체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탐하기도 하고 재산을 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다 백성들과 관리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면서 예레미야를 구하여 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방인 그것도 내시가 예레미야를 구하게 됩니까?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구스인의 경우를 성경 몇 곳에서 봅니다. 

민수기 12장을 보시면 모세의 아내가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였는데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이 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소환하여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합니다. 미리암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미라임아 더 많이 비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나무란 것은 왜 동족여인도 많은데 구스 여인을 후처로 취하는가 하는 질책입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주의 종을 욕하면 저주 받는다는 말로 해석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이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님을 율법을 받은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계시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여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이 나병이 들자 모세가 기도하여 낫게 됩니다. 이것을 주의 종으로 욕하면 저주 받는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심판을 받는다고 말해야합니다(약4:17, 히10:26~29).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지를 구스 인의 피부와 표범의 반점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어떻게 스스로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 흑인들이 흰색의 피부를 선호하여 온갖 독한 약을 발라서 피부괴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괴사가 일어나면 그것을 수술하여 내더라도 흰 피부색을 위하여 계속 그렇게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비유에 사용될 정도의 검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구스인입니다. 이런 구스인이 어떤 유대인도 하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구원하여 내는 일을 합니다. 

본문 7~8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냥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 내시 구스인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음을 듣고 왕에게 가서 아룁니다.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 일을 허락한 왕도 악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중에 떡이 떨어졌는데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거기서 굶어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 안에 양식이 떨어졌다는 말은 바벨론이 포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이 공격받을 때에 1년 6개월간 포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죽이기 위하여 감옥에 넣어둔 자에게 떡을 가져다 줄 자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하여 예레미야를 죽기 전에 구덩이에서 끌어내라고 합니다. 왕이 이런 명령을 한 것도 하나님께서 아직 예레미야를 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11~3절입니다. “봉독”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헝겊과 낡은 곳을 가져다가 밧줄을 만들어 구덩이에 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그 줄을 겨드랑이와 그 아래에 대라고 하여 끌어 올립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아무도 예레미야를 살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왕과 신하들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예레미야를 구한 사람이 이방인 그것도 흑인 내시 에벳멜렉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에베드’라는 말과 ‘멜렉’의 합성어입니다. 에베드는 종이라는 말이고 멜렉은 왕입니다. 왕의 종입니다. 그런데 내시이며 왕의 종이지만 왕과 왕의 신하를 책망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내시이며 구스 사람인 에벳멜렉에게서 나올 수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은 에벳멜렉의 조국도 아닙니다. 조상들 중에 전쟁의 포로로 잡혀오거나 빚에 팔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조상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다가 아이를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조롱을 받았을까요? 이런 자가 거세까지 당하였으니 결코 예루살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관리들과 왕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악한일이라고 하면서 예레미야를 구하여 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한 자들에 의하여 죽임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목숨을 건 일입니다. 어떻게 이방인 흑인 내시가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는 자들도 하지 못하는 이 일을 어떻게 하게 됩니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일 오전에 보는 마태복음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모압 여인 다말,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나오미의 며느리 룻,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 이런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도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나온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좋은 도구들입니다. 이들의 모든 믿음이 앞에서 본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이란 죽은 데서 살리시는 것이며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남을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속성이 바로 없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나오기에 이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9:15~18절입니다. “15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앞에 이루리라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내용은 에벳멜렉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하고 나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구하기 전에 이미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 성이 멸망할 것을 에벳멜렉의 눈으로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날에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하시면서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에벳멜렉을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말씀만 보면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으로 예레미야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런 에벳멜렉을 그 믿음으로 보시고 구하여 주신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이 바로 처음에 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화 된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데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고위관료들과 왕을 책망하여 예레미야를 구한 것은 사람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바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선물로 주시고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도 자랑 못합니다. 

에베소서 2:8~10절입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까지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으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미 말씀드렸기에 이 부분만 다시 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 은혜, 구원이 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로 믿음의 가문이니, 어떤 은혜를 받았느니,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인간 자랑을 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할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선한일이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2: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 일을 여기서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려내셨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어두운데서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의 나라입니다. 이들이 할 선한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일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어둠 속에 태어나서 어둠 속에 살다가 영원한 어두움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따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의롭다 함을 받고 빛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전하는 것이 선한일이며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진해에서 교사 세미나를 마치고 진해의 몇 분들과 차를 마셨습니다. 제가 강사로 섭외된 뒷이야기를 조금 들었습니다. 저를 아는 몇 분이 추천하기도 하였지만 결정적으로 저를 추천한 사람은 평소에 저의 설교를 듣지도 않는 사람이라도 합니다. 다른 분이 저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은 잘 듣지도 않으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는지 임원회에서 적극 추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코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의 능력도 듣는 자의 능력도 아닌 오직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믿음의 원인이 나에게 없음이 믿어지는 자들이 은혜로 믿음이 주어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