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열왕기하 4:32-37 엘리사의 기도 2010. 6. 2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엘리야가 하늘로 이끌려 올라갈 것을 제자들이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세 번이나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 다녔습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엘리사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하며 따라다녔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였을 때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하여 역사하는 능력을 배나 더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가는 것을 보고나서 엘리사에게 권능이 임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배나 더 많은 권능을 나타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선지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아는 것이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인 양 큰소리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시드기야와 미가야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거짓말 하는 영을 받은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하나님의 영이 나를 떠나서 어떻게 너에게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기에게 독점적으로 임한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거짓말 하는 영에 의하여 거짓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살아나는 기적은 4:8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엘리사가 수넴에 이릅니다. 한 귀한 여인이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합니다. 귀한 여인이란 부유한 여인을 말합니다. 선지자의 주변에 가난한 여인들도 등장하지만 부유한 여인들도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공궤한 자들 중에 부유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를 간절히 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 마다 음식을 먹으로 그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9-10절을 봅니다. 그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엘리사는 대머리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이 놀라다가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42명이 찢어져 죽는 일도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한 것은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이 상태가 이 모양이지만 하나님의 택한 남겨진 자들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자고 하였습니다. 슬라브 형식의 집이기에 담으로 연결하여 짓게 되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출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이 이렇게 한 것은 선지자로 하여금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선지자가 그 방에서 쉴 때에 게하시에게 그 여인을 부릅니다. 선지자가 그 여인에게 네가 이 같은 세심한 배려를 하니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구하여 해 주면 좋겠느냐고 합니다. 왕에게나 사령관에서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어디로 오는지를 알아서 방어하게 한 것이기에 왕도 군 사령관도 엘리사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여인은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거저 백성들 가운데 거하고 있으니 그런 청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이 여인이 엘리사를 세심하게 배려하여 섬긴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나중 일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결국은 왕에게 호소를 하려고 오는 때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8:1-6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에 7년 흉년이 든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인데 배나 되는 것입니다. 흉년의 기간이 배가 되는데 엘리사의 능력도 배로 나타나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블레셋 지역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칠년 기근이 임할 것을 알고 미리 피하게 합니다. 칠년 후에 오니 자기의 땅을 다른 사람이 경작하고 있습니다. 왕에게 자기의 땅을 돌려달라고 하기 위하여 왔는데 마침 그 시간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왕에게 엘리사가 죽은 아들을 살려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여인이 바로 그 여인이라고 하자 왕이 한 관리를 임하여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땅을 돌려주고 그 여인이 떠난 시기부터 지금 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고 한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로 알고 그를 접대하였는데 칠년 기근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땅과 소산물로 다 돌려받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4:13절을 봅니다. 여인이 아무것도 엘리사에게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여인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자 게하시가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게하시를 통하여 그 여인을 다시 부르게 합니다. 그 여인이 문 앞에 서자 엘리사가 말합니다. 한 해가 지나 이 때 쯤에 네가 아들을 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여인이 무엇이라고 합니다.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식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통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신 아들을 죽게 하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주시고서는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본물을 보면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잘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복이냐는 것도 살펴보아야 하고 그 하나님의 종이 거짓 종이라면 복이 아니라 화가 임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이런 기적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엘리야의 기도에서 보았습니다. 기근시에 사르밧 과부에게서 공궤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가루와 기름으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먹고서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지자의 말을 듣고 먼저 선지자에게 공궤함으로 기근에서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흉년에서 차리라 굶어죽는 것이 낫지 양식은 있는데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죄를 알고 또 죽은 아들이 살아남을 통하여 엘리야가 참으로 여호와의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엘리야가 부정과 접촉하고 시체와 접촉함을 통하여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을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심과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4:25-27절에서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 택함을 입었고 엘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에 유대인들이 단단히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외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을 말하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서 복을 받자고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잘 섬깁니다. 이런 말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먹혀들어가는 것은 마치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계속하여 이런 설교가 되어 지면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처럼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국제 펜클럽회장을 맡은 바 있는 하인리히 뵐의 ‘카테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을 보면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설교를 듣지만 뵈레아 사람들처럼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는 뜻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나타난 사렙다 과부나 수넴 여인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주의 종을 잘 대접하여 복을 받은 것이 무슨 복이냐고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선지자가 가까지 와서 자기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은 멀쩡한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여 그 아들이 살아났을 때에 그 여인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고 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엘리사와 수넴 여인에게 일어난 것은 아예 없는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역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주도면밀한 공궤를 받고서 무언가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도 하고 응답을 받았는지 기록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자라서 추수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갔다가 그만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아버지가 아이를 어머니에게로 보냅니다.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한나절 정도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여인이 아들은 선지자의 방 침상위에 눕혀두고 남편에게 사환과 나귀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겠다고 하니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어쩐 일이냐고 하니 평안을 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사환에게 말하기 전에는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고 합니다.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보고 게하시를 보냅니다. 평안을 묻습니다. 수넴 여인과 남편과 아이의 평안을 묻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평안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무슨 평안입니까? 그런데 여인은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반어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없던 아이가 생긴 것은 사라처럼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에 고통이 심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자에게 나아와서는 그의 발을 안았습니다. 그의 발을 붙잡은 것이지요! 게하시가 물리치려고 하니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의 영혼의 괴로움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모르는 것입니다.

 

이때 여인이 말합니다. 25절입니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괜히 없는 아들 주시더니 왜 죽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인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자기 지팡이를 주면서 누구에게도 인사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 얼굴에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맹세 하는 방식으로 맹세합니다. 30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엘리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에게 주어진 믿음인 것입니다.

 

게하시가 돌아와서는 아이가 깨지 않았다고 합니다. 엘리사가 자기 침상에 눕혀져 있는 죽은 아이를 앞에 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아이 위에 엎드려서 입에 입을 대고 눈에 눈을 대고 손에 손을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따뜻해지며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니 아이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 어미가 아이를 안고 선지자에게 엎드려 절한 후에 나갔습니다. 선지자는 나실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여야 할 선지자가 죽은 아이에게 완전히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접촉하여 살아납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입니다. “봉독” 이삭을 바칠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은 없는데서 받은 자식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없는데서 생긴 것이며 죽은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통하여 수넴 여인에 복을 받았습니다. 무슨 복입니까? 없는데서 다시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이 죽은데서 다시 살아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원한 복이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리에게 오셨고 그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그의 십자가로 용서하심도 알게 하시는 것이 영원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