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에스라 8:21-23 에스라의 기도 2010. 7. 21

 

21 그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오늘은 에스라의 기도에 대하여 봅니다. 에스라의 기도가 에스라서에서 두 번 나옵니다. 방금 읽은 본문과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한 일에 대하여 회개 하는 기도입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2차로 돌아온 자들의 인도자입니다. 바벨론에 왜 포로로 잡혀갔는지에 대하여 주일 낮에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언급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의 내용, 즉 창조의 선물과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데 겉으로는 안식일은 지키지만 속으로는 빨리 안식일이 끝나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역대하 36:20-21절을 봅니다. “20 칼에서 살아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립니다. 바사국이 통치할 때 까지 그렇게 되는데 22-23절도 함께봅니다. “봉독”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고레의 왕의 마음의 감동시켜 유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십니다. 이 본문과 에스라서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이렇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과정이 1차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중심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2차로 에스라를 중심으로 유다 백성들이 돌아와서 율법을 가르치며 이방인과의 결혼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3차로 느레미야를 중심으로 돌아와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협력하여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합니다. 1차와 3차는 성전과 성벽의 재건이라면 2차로 돌아온 에스라는 마음의 성전 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기도를 통하여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에스라 7:6절을 봅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직계 후손이며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입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사람입니다. 고레스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 시키시듯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바사가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고 또 바벨론 왕이 많은 예물을 드리게 하며 유브라데 강 건너편의 총독들에게도 조서를 내려 에스라를 돕도록 합니다.

 

7:11-26절을 봅니다. “봉독” 바사는 페르시아 제국을 말합니다. 얼마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왕인지 세계역사를 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이런 제국의 왕이 에스라에게 필요한 일들을 조서로 내린 것입니다. 그 조서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구라도 올라가기를 원하는 자는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왕과 자문관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것을 가져가게 하고 다른 금과 은도 가져가서 제물이나 물품을 구입하여 여호와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도록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인의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다면 왕궁 창고에 있는 것 중에 네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다가 드리라고 합니다. 또한 21절에서 유브라데 강 건너편의 모든 창고지기에게도 조서를 내립니다. 에스라가 원하는 것들을 신속하게 공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물품들의 상한선을 정하여 줍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왕과 왕자들이 진노를 받지 않게 하려고도 합니다. 또한 성전의 봉사자들에게는 세금을 받지 않게 하며 에스라가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재판하게도 합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으면 그 죄를 정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 하거나 옥에 가두라고 합니다.

 

대 제국 바사 왕 아닥사스다 왕의 이런 조서를 받은 에스라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27-28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왕과 그의 모든 방백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의 손이 에스라의 위에 있기에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신임을 받는 에스라가 왕에게 다른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였을까요?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하는데 그들을 보호할 보병과 마병을 요청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요청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을 21-23절을 봅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겸비하며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자기들이 예루살렘까지 가야 하는데 어린 아이들과 소유물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간구합니다. 바사 제국의 보명과 마병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여호와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왕에게도 증거 하였습니다. 그 증거의 내용은 22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고 합니다.

 

23절을 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얼마든지 보호 받을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겠지만 그런 부탁을 하려니 부끄러워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입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간구도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움과 힘을 위하여 세상의 힘과 권세에 간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을 당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인맥을 찾아 나섭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아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의사에게 물어봅니다. 전에 부목사 때에 학생이 사고를 냈습니다. 상대방은 어느 형사를 알아서 처리하는데 이 학생의 부모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연락이 와서 경찰서에 갔습니다. 그때 교인 중에 동부지청에 근무하는 분이 계셔서 여러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청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이런 일들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욕을 얻어먹는 일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서울의 남포교회 목사님이 처음에 하나님의 열심을 이야기 하다가 이제는 성화론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누가 물으니 쪽팔려서 그런다고 하였답니다. 교인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욕을 얻어먹는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쪽팔려서 성화론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스라와 비슷합니까? 에스라는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보아서 부끄러워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이 쪽팔려서 성화론을 이야기 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의미에서 말할 수 도 있지만 예수 믿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스라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늘 얻어먹는 이방여인과 같을 때 믿음이 크다고 하십니다. 물론 세상에서 자신이 잘못하여 손가락질 받는 것이 잘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을 얻어먹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세상의 가장 힘 있는 왕에게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지 아니한 것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바울사도도 이렇게 증거 합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고전6:7). 또한 자기 자신이 차라리 주려 죽을 지라도 고린도 교회에 아쉬운 소리 안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않게 하겠답니다(고전9:15). 이런 신앙이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두 번째 기도를 보겠습니다. 9:1-15절입니다. “봉독” 긴 기도의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정착하였는데 이스라엘 방백들이 이방인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고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라가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 정말로 기가 막히면 기도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가 막혀 앉아있는데 누가 에스라에게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는 자들이 나아옵니다. 저녁 제사 드릴 때에 옷을 찢은 그대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오전에 이런 보고를 받고서 저녁까지 기가 막혀 앉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도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서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친다고 합니다. 우리의 조상과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여러 왕들에 손에 넘겨 칼에 죽고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멸망하여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잠시 은혜를 베푸셔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겨우 숨 한번 돌릴만한 틈을 주셨는데 벌써 이방인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남겨두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도 세우게 하시고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는데 이렇게 여호와를 반역하였으니 이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셔서 이만큼이나마 남겨주셨는데 또 거역하였으니 한 사람도 주께 설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보면서 인간은 숨 돌릴 틈만 생겨도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욥기 7:19절입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다른 번역을 보면 침 꼴깍 삼킬 동안이나마 나를 내 버려두시면 안 됩니까? 라고 하소연합니다. 욥을 고난으로 밀어붙이시는데 침 꼴깍 삼킬 여유도 없이 밀어붙이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나중에 그렇게 의롭다는 욥조차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행위대로 하나님이 갚으신다면 진멸당해도 마땅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숨 돌릴 틈만 생겨도 죄지을 생각을 하고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에스라가 기가 막혀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회개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회개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10:1-4절입니다. “봉독” 에스라의 기도에 동참한 무리들이 그 앞에 모입니다. 범죄 하였으나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의 따라 그 아내와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찬성하는 자들이 도와서 정리하였습니다. 10-11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끊어버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할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실상을 말씀과 성령으로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여 하겠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성령을 통하여 제대로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에스라처럼 우리도 기가 막혀 기도조차도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에스라는 죽었지만 예수님과 성령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