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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0:17-28 기도응답 받고도 패배함 2010. 3. 10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시는지라

 

기도하면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주류적인 흐름입니다.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나름대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보면 그것은 단지 나의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응답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보면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응답이 아니라고 한 것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오지 않아도 수많은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거저 우리의 조상 때로부터 빌어 왔던 내용들을 단지 수신자만 다르게 빌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도하는 내용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세 번다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응답을 받고 나갔는데 첫 번째는 이만 이천 명이 죽고 패배하였습니다. 두 번째도 응답을 받고 나갔는데 만 팔 천명이 죽었습니다. 분명히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아 나갔는데 왜 이런 엄청난 패배를 당하는 것입니까? 그 내용을 보기 위하여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사기 19-21장이 이 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이 바람을 피우고서는 친정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레위사람이 그 첩을 데리러 장인의 집에 왔습니다. 장인은 이 사위의 마음을 좋게 하려고 지극한 대접을 합니다. 삼일을 대접을 받고서 첩과 함께 떠나려고 하니 만류를 하여 하루를 더 머물고 그 다음날도 머무르게 하려고 하자 다시 밤을 지내지 않으려고 오후 늦게 떠납니다. 나귀와 종까지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기업이 없어야 하는 레위인 인데도 부자입니다. 그리고 첩이 있다는 것은 레위인이나 누구나 간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인데 이곳에 왔을 때에 종이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가서 밤을 지내자고 합니다. 오후 늦게 출발했으니 벌써 저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이스라엘 자손에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가지 않고 기브아로 가자고 합니다. 여부스는 아직 정복이 되지 않고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 것입니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기에 이런 자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데 아무도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면서 그들을 보고 자기 집에 영접합니다. 이 사람도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는 사람이었는데 기브아에 거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들을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하니 레위인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유숙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 노인이 자기가 담당하겠다고 하여 그들을 인도하여 집으로 영접하여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네 불량배들이 와서 이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그와 관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이 자기의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을 내어 주겠으니 그 남자를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레위인이 자기 첩을 내어줍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의 모습과 같습니다. 롯의 집에 들어온 천사를 내어 놓으라고 하듯이 이들이 그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자기 첩을 내어주자 그들이 밤새 윤간하고 보냅니다. 첩이 아침에 그 노인의 집 문 앞에 엎드려져 죽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죄악의 끔찍함을 그대로 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지금 부산에 여중생이 성폭행범이 잡혔다고 뉴스에 크게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범인을 향하여 마구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범죄가 일어나게된 책임은 없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어려서 교회앞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길에서 태어났다고 길태라고 한답니다. 이 아이를 양 부모가 키웠는데 몇번의 범죄로 교도소에서 11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사사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죽임당한 첩을 레위인이 자기 나귀에 싣고 자기 집에 가서는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낸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런 이스라엘 자손이 이런 일을 보고서 모여서 의논하려고 미스바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가 미스바에 모인 것입니다. 미스바는 기브아 가까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모든 지파의 어른들이 모였는데 칼을 빼는 보병이 40만 명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베냐민 자손들도 들었습니다. 레위인이 이 사건을 설명하였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리가 한 사람도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자고 하면서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제비뽑아서 군량미를 준비하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그렇게 범죄 한 불량배들을 넘겨주면 우리가 죽여서 이스라엘 죽에서 악을 제거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람들이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기브아에 모여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군사는 이만 육천이고 기브아의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이들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40만대 2만6천7백 명의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20:18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 기도합니다. 응답이 주어집니다. 유다가 먼저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갔는데 결과는 기브아 주민들에게 패배를 당하여 무려 2만 2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악을 응징하기 위하여 모였고 기도하여 응답까지 받았는데 엄청난 숫자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22-23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여호와 앞에 저물도록 울며 기도합니다.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처음에는 이렇게 묻지를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을 응징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패배하였으니 이제 싸워야 하느냐고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올라가서 치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올라가서 쳤는데 다시 1만 8천이나 죽임을 당하며 패배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두 번이나 응답받아 올라갔는데 왜 패배한 것입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의 숫자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브아에 물매를 던지는 자들이 있어도 그들의 수가 4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날 패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패배하였으면 철저하게 자기들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아직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용기를 내어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결국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란 숫자에서 나오기에 그들이 믿은 것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공격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아간이 범죄 하였기에 작은 아이 성에서 졌습니다만 그러나 그 아이성을 공격할 때에 여호와께 묻지도 않고 거저 우리가 다 갈 것 없이 몇 천 명만 가면 된다고 하여 갔다가 36명이 죽임 당하고 패배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 문제를 처리하고 다시 올라가서 정복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힘을 달라는 기도 외에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패배원인은 자기 정당성으로 보입니다. 끔찍한 토막 시신을 보고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니 기브아 사람들이 잘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정당한 심판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기브아를 누가 앞장설까만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베냐민을 칠까를 물어보고 응답을 받았는데도 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기도응답을 받고 갔는데도 졌다는 것은 그들이나 너희가 똑 같다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연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패배하자 무엇을 하게 됩니까? 26-27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벧엘에 올라가서 울며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번제란 속죄제로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남들을 치기 전에 먼저 자기들의 죄가 속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티를 빼기 전에 자기 눈의 들보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이런 엄청난 사상자가 난 것은 그것도 악을 행한 자들에 의하여 군사도 열배나 적은 군사에 의하여 사만 명이나 죽은 것은 그들의 죄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다시 여호와께 묻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이고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여호와께 묻습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두 번의 패배로 자기 정당성이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자기들의 죄를 먼저 보게 되니 싸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올라가라고 합니다. 내일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고 합니다.

 

이런 응답을 받고 올라가서 전쟁을 하는데 아이성 전투처럼 유인 매복 협공으로 이깁니다. 범죄 한 자나 군사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진멸하듯이 진멸전쟁을 펼칩니다. 정신없이 죽이다 보니 6백 명만 남아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다시 웁니다. 한 지파가 궐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스바의 총회에 모이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을 공격하여 처녀만 남기고 진멸하여 그들에게 줍니다. 그런데 2백 명이 부족합니다. 다시 축제하는 장소에 가서 취하여 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겨우 한 지파가 사라지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대부분 자기 정당성으로 인한 항의성 기도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하필이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나는 억울합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는데 왜 이러십니까? 그러니 저들이 망해야 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란 아예 자신은 그런 기도를 할 자격도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거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인 주님을 만난 자의 고백입니다. 바울사도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여겼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정당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로 죽은 예수님을 보는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