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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1~32 하나님의 생각 2014. 5. 7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11~14을 먼저 봅니다. 이 구절은 교회 좀 다닌 사람이라면 몇 번은 들어보셨을 말씀입니다. 부흥회할 때에 이런 말씀을 잘 사용합니다. 대부분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여러분이 재앙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얻으려면 온 마음으로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평안과 희망과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주께로 온전히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 여러 곳을 찾아서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들은 그동안 잘라먹은 십일조부터 감사와 헌신들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돌아와야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고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생각이 이런 부흥사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말하는 그런 생각일까요? 과연 그러한지를 말씀을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상당히 깁니다. 간단하게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로 써서 바벨론에 사절로 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미 포로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년 만에 돌아온다는 그런 소리를 듣지 말고 그곳에서 집을 짓고 결혼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 나라가 평안하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70년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스마야가 예루살렘의 성전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어 예레미야 같이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하는 자를 왜 차꼬에 채워 가두지 않느냐고 하는 두 개의 편지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제대로 반영하였다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나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까요?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재앙으로만 가득해 보이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평안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종교꾼들에게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신에게 정성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야 신이 복을 준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회개하라는 말로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생명 얻는 회개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항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악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라는 말로도 결국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기를 위한 회개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오늘 신앙상담에 공개적인 글이 올라왔습니다. “어린학생들을 포함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명도 구조되지 못하고 모두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목도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간구에도 아무 응답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요? 지구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려 죽어가고 이유 없는 전쟁으로 인해 힘없는 이들이 죽어가도 아무런 손짓이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계신 걸까요?” 교회 다닌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든 절이든 간에 ‘미안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노란 리본과 현수막을 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규에 침묵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침묵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때는 전 인류가 물로 심판을 받는데 노아 가정 한 가정만 방주에 탑니다. 더구나 일주일전에 문은 닫혔습니다. 이 동일한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을 불사르기 위하여 보전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세월 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이 평소에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기에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까?


창세기 6:5~8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 죄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가끔 악한 것이 아니라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 그 악한 모습이 어떠한지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노아 홍수 때처럼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여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누구를 좋게 하기위하여 살았는지 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는 어떠하였을까요?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살지 않았을까요?  노아도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구원을 얻은 것은 그 마음이 가끔이라도 선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주의 준비도 하나님의 은혜가 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기에 방주를 예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나서 노아의 행함이 보태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몰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입니다. 내가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라고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29:1~4절입니다.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 사절단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편지로 써서 보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5~10절입니다.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2년 만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곳에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결혼도 하여 번성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 성읍의 평안도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과 반대의 말을 하는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죄를 범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을지라도 고국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을 우리는 글자로 읽고 있지만 실제로 끌려가면 가족이 헤어지고 죽고 병들고 극심한 고난 중에 있습니다. 이럴 때의 꿈이란 자나 깨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시편에서 봅니다.


시편 137:1~6절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시온을 향하여 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70년 동안 그곳에서 눌러 살면서 그 성읍을 평안을 빌라고 합니다.


오늘본문 11~14절을 봅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편과 이 본문의 말씀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생각하시는 것이 평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심으로 주께 기도하고 여호와를 구하면 여호와께서 만나 주시고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는 70년 이라고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2년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좋게 들리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좋게 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 귀에 좋게 들리는 말을 하는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의 말을 듣지 말고 너희가 꿈을 꾸는 것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나 깨나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갑니까? 지금 나의 삶에 재앙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속히 떠나가기를 바랍니다. 가난의 문제, 질병의 문제,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교회의 문제, 온갖 세상의 힘 드는 일들이 실타래 엉키듯이 엉켜있는데 이것을 단칼에 해결할 그런 비법을 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인지상정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너무나 거슬리는 말입니다.


2년과 70년입니다. 70년이란 한 사람의 생애전부입니다. 또한 완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70년 만에 돌이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평생에 쨍하고 해 뜰 날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해 아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인생들이 수고가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헛된 인생 속에서 순간의 쾌락을 위하여 영원을 팔아먹지 말고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생이 티끌이며 풀입니다. 이런 인생임을 누가 알고 주의 노를 누가 알겠습니까?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수고와 슬픔을 일평생 당하였는데 그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수고와 슬픔을 통하여 그 영원한 영광과 은총을 바라보게 됩니다.


로마서 8:18~26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이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이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의 과정이며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만 허락된 이러한 고난의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한 70년이라는 잠간의 고난을 통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들과 사라질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잠깐 고난을 당하게 하셔서 영원한 영광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과 일하심에 아우성을 지릅니다. 죽겠다고 악악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시면서도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보이는 것들에 희망을 걸도록 합니다.


본문 15~23절입니다. “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16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좀 복잡한 내용입니다만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유대의 왕과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 중에 있는 선지자들도 계속하여 거짓된 평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있기에 이러한 것들을 차단해 버리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열매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이미 24장에서 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치시며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19절에서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냈지만 그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을 하는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바베론 왕 느부갓네살에 붙여서 죽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셔서 이들의 죽음이 저주 받은 자에 대한 말거리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간음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전하였지만 거짓된 내용이기에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됩니다.


본문 24~32절입니다. “24 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26 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8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서 들려 줄 때에 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1 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 중에 스마야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성전 감독에서 편지를 써 보내는 내용입니다. 본문이 길고 복잡해 보여도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재앙과 평안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어 볼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 나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은 스스로 닫아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줄 자만 보여주시기에 계시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평생이 재앙임을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된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만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죽음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들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는 잠시의 재앙을 통하여 영원을 사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깊은 생각입니다.


로마서 11:32~36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그 깊으신 생각을 더욱 풍성히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