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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51:54~64 영원한 폐허 2015. 4. 29

 

54 바벨론으로부터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도다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리도다 55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사 그 큰 소리를 끊으심이로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 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예레미야 50:1절부터 시작된 바벨론 멸망에 대한 말씀이 오늘로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살펴본 내용의 제목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으로 바벨론의 멸망 속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구속하여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도망하라 언약 백성이라면 바벨론에서 도망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위한 심판 언약 백성들에게는 심판을 통하여 용서를 알게 하십니다. 교만하였음이라 모든 세상의 심판 이유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칼이 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복의 때가 온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네 끝이 왔도다가 이루어지고 그 끝이 온 것을 멸망의 산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판을 타작마당으로 보여주시고 이런 멸망의 자리에서 빠져나온 자들은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는 것이 지난주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54~56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의 부르짖는 소리란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고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시고 그 큰 소리를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겠습니다만 여호와께서 그 요란한 소리를 끊어버리시면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나옵니다. 이러한 요란한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자의 세력은 그들보다 더 강한 소리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물 같고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들이닥칩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보복의 때입니다.

 

57~58절입니다. “봉독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호령하던 바벨론의 힘 있다는 자들인 고관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다 취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때는 세상을 취하게 하던 바벨론이 이제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하여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의 권력과 영광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여 높고 튼튼한 성벽을 만들고 높은 문을 만들었지만 그 성벽은 훼파되고 그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그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며 민족들의 수고도 불탈 것이라고 합니다.

 

바벨론의 수고도 헛되지만 바벨론을 기대며 살았던 뭇 민족들의 수고도 불탈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보았습니다만 세계의 가장 강대국을 의지하여 살고자 수고한 것들도 함께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4개국을 912일 동안 외교를 하느라고 병이 났다고 합니다. 순방 중에도 링거를 맞아 가면서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 나라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에 어떻게 하든지 나라를 잘 살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러한 노력들이 바벨론에 기대는 열국의 모습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병이 나도록 외국을 순방하였지만 그 수고가 영원하지 못할 불에 탈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성벽을 넓히고 튼튼히 세우고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을 높여두는 것이 삶의 방향과 목적이라면 속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나의 성벽을 넓히고 나의 대문을 높인 바벨론이 멸망하고 그 바벨론을 의지하던 자들의 수고도 그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다 헛된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명명백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공부를 많이 해야 알고 원어를 해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만 알아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우리의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라디오에서 야베스의 기도를 어린이들이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베스가 기도하여 자신의 지역을 넓혀 주시고 환난을 벗어나게 하여 달라는 역대상 4:10절의 말씀은 부동산 넓혀달라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땅을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기업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선물로 받은 땅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경계표를 옮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도 오늘날 이런 노래를 뜻도 모르고 부르고 있습니다. 의미를 알려면 야베스가 하나님의 기업을 잃어버린 자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업을 물려주시도록 간구하였고 친척이 물려주었는지 아니면 형편이 나아져서 그 기업을 물렸는지 모르지만 이 기도의 응답은 여호와의 기업을 받은 것으로 말해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나의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문자대로 부동산 넓혔다는 이야기로 전하고 믿게 하는 것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를 하여 지옥 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59~64절입니다. “59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

 

갑자기 시간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왕 제 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갑니다. 스라야는 바룩의 형제입니다(32:12). 스라야가 왕의 측근으로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이유는 이 당시에 반 바벨론 연대를 위하여 에돔와 모압과 암몬의 사절단이 시드기야 왕에게 왔습니다(27:3).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그 멍에를 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바벨론을 반역할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시드기가야 바벨론에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왕과 함께 가는 스라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하여 보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가서 읽고 나서 그 기록한 책을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벨론이 영원한 폐허가 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바벨론 멸망의 말씀을 바벨론에 가서 읽고 난 후에 그 책을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이미 바벨론은 멸망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유다도 완전히 망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되었고 그 선포된 말씀의 책을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짐으로 인하여 이미 완료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묵시와 역사라는 말을 합니다. 묵시란 계시라는 말과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 계시는 묵시 속에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완성된 내용이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이미 멸망 받은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영원한 폐허로 보이는 사람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한 성도입니다.

 

요한계시록 18:21~24절입니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 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을 큰 천사가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서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스라야에게 바벨론 멸망의 내용을 읽은 후에 그 책을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는 그 말씀대로 고대의 바벨론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말하는 이 바벨론은 로마입니다. 이 로마도 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멸망하는 이유는 그 성 안에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중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죽임 당한 선지자와 성도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이 세상이 이미 멸망하였다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죽인 자들은 누구입니까? 창세기에서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 우리의 이름을 내며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그 세력들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세력이 바벨론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은 묵시 속에서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이 역사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내용을 부채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부채가 접혀져 있는 것을 묵시로 복고 펼쳐지면 역사로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로 펼쳐지기 전에 이미 묵시 안에 역사의 창조와 그 과정과 멸망까지 다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란 역사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묵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11:3).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곧 묵시로 지으신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선물로 주셔야 되는 믿음입니다. 묵시 속에 숨겨진 내용들을 역사 속에 펼쳐내십니다. 그 뜻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택하신 이유는 그의 피 뿌리심을 얻게 하려고 택하셨습니다(벧전1:2). 이런 자들은 이 세상이 이미 불타 멸망한 곳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성도라면 이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멸망한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영원한 폐허로 보여야 합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그 소리들, 요한계시록 18:22~23절의 소리를 요약하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내용들입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그 소리들이 결코 다시 보이지도 들리지 않습니다. 전에 요한계시록 설교할 때에 결코 다시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말씀드렸습니다. 결코 다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아니할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울고불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코 다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할 것들을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멸망한 세상임을 아는 자가 종말의 영인 성령이 임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부어주신 자들만이 세상의 끝을 알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11~15절입니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 이 당시에는 할례 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는 박해를 피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그 핍박을 면하려고 육체의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만 육체의 자랑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지만 이런 것은 나만이 안다고 하는 그런 것도 결국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자랑합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이 동일한 성령이 임하였다면 바울과 같이 동일하게 세상을 보게 됩니다. 내 쪽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다면 세상이 죽은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보면 내가 죽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죽은 사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들이 다 의미 없는 것으로 보여 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은혜로만 됩니다.

 

네팔의 지진 소식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 사망자만 5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만 명도 넘게 사망자가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큰 지진으로 사망자가 그 정도로 나온 것은 적은 수라고 봅니다. 제가 적은 수라고 한 것은 그런 큰 지진이 대한민국에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네팔은 전기의 부족으로 생활의 불편함이 많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에너지를 도입하지 않고 소수력 발전이나 태양광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지진이 한국에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에 핵발전소 21기 가 운영 중인데 그 중에 몇기는 사용연한이 넘은 원자력을 연장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 지진이 일어나면 체르노빌이나 일본의 핵발전소 폭발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수천 명 수만 명의 문제가 아니라 피폭되는 사람들이 수십만 수백 만 명의 될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두렵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안전 불감증이라고 할 정도로 안전에 대한 생각들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모두가 믿음이 좋아서 이미 이 세상이 멸망한 것으로 보여서 그런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만큼 세상에 대한 성공욕망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 속한 교회라는 곳도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묵시 속에서 멸망한 세상의 영광을 쫓아가는 교회라면 그곳은 결코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곳에서 도망쳐 나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화요일 책 몇 권을 샀습니다. 그 중에 미국의 911 테러 때에 도망치라는 설교를 한 카터 콜론 목사의 책도 한권 샀습니다. 제목이 예수만 남겨질 때까지입니다. 영어로는 ‘UNSHAKABLE’입니다. 그 내용은 세상에 모든 것들이 다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아니할 내용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금융 위기가 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핵폭발이 일어나고, 세상의 관계들이 다 무너져 내릴 때에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성도는 오직 예수님만 남겨지도록 이 역사 속에서 흔들립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지 아니할 것들을 남기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히브리서 12:26~29절입니다.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흔들리지 아니할 주님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흔들림이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런 소문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성도는 두려워하여 자기의 소유를 꼭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이 영원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담대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