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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22-32 아브라함의 기도 2009. 11. 25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베드로전서 4: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냥 기도하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기에 정신을 차리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계시의 말씀을 받은 때가 약 2천 년 전인데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근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여도 종말이 가까웠다는 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도, 내가 신에게 정성껏 빌어 내 소원을 이루어보겠다는 기도가 되어버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밥은 먹고 살만하니 배고플 때 간절하게 기도하던 그런 기도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금요기도회를 하다가 지금은 수요일로 바꾸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이런 시대에 기도에 대하여 성경을 통하여 알아보고 기도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미 경고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종말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베드로 사도의 말로부터 시작을 하는가 하면 종말이란 것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을 통하여 모든 역사를 마감하시지만 그러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역사란 성경을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란 일반역사와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란 그 시대 속에서 종말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았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피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가인과 아벨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아벨이 가인에 의하여 죽임 당하였지만 그러나 그 피가 하늘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저주를 받았고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니 아벨로부터도 믿음의 사람들은 종말의 자세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이야기 다음에 바로 에녹과 노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는 낳고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에녹이 예언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유다서1:14-16). 그것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이 땅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였기에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 후 므두셀라가 죽던 해가 바로 노아600세 즉 홍수가 나던 해가 됩니다. 노아도 종말의 현장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창세기 5장부터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최종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이지만 예수님께서도 종말이란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고팔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마음이 빼앗기며 살지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이 땅에 세우심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을 소망하게 살게 하시는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하면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서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많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잘 아시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성의 롯을 위한 기도로 롯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하여야 하는지 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모습으로 두 천사와 함께 왔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손님접대를 융숭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하브리서 12:3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천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대접을 받고서 떠나려고 하다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기에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언약을 받았으며 그 언약체결은 15장에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의 죄악의 관영함을 인하여 심판을 해야 하겠기에 두 천사가 알아보러 간 중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그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의인 50명만 있다면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50명이 있을 것 같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줄여나갑니다. 27절을 보시면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한다고 하면서 오십 명 중에 오명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래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계속하여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 들어간 두 천사를 롯이 성문에 앉았다가 역시 나그네 대접을 위하여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상관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성연애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소도미라는 단어가 동성연애를 뜻하며 그 어원을 창세기 19장에 두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죄악이 관영한 도시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내어놓지 않으면 롯의 집안을 해하려고 합니다. 두 천사가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함으로 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이 성을 하나님께 멸하시기로 하셨으니 다른 가족이 있으면 연락해서 빨리 이 성을 함께 빠져나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두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말을 하니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런데도 롯의 가족이 지체를 하자 두 천사가 네 사람의 손을 잡아 성에서 끌어냅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창세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내용이 종말의 심판을 모델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최초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심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물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롯을 구하여 내십니다. 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맺으셨기에 이 땅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9:2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서 롯을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역할은 예수님의 역할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실 분이시기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와 별 다를 바 없는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1-32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까지 함께 하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사단이 베드로를 가지고 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배신하여도 다시 돌이키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롯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도를 생각하여 롯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기도한 것 보다는 나은 효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롯이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의 삶은 즐겁거나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4-8절입니다. “4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여기서는 롯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도 아브라함의 기도의 혜택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심령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은 우리 속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데 그 기도의 소리가 들립니까? 아브라함이 기도하여도 롯의 마음이 불법을 보고서 떠나지는 못하지만 마음이라도 상하였다고 하는데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우리의 심령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기도소리와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나와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을 보면서 심령이 상하는 고통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