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6:5-8 기도할 때에 2010. 11. 24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동안 구약에서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것과 성경에서 증거 하고 있는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더 나은 조건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서 더 나은 있음을 원하는 것을 기도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다 종교적인 기도임을 구약에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인간의 욕망이 그 당시의 우상숭배로 나타났습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과 같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풍요와 다산의 신들을 따라 간 것입니다.

 

오늘 교회로 모인 우리들도 성경에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단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기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내용들을 이미 구약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신약에서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처음이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친히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 관한 말씀도 산상수훈 안에 들어있습니다. 산상수훈이란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 내용의 서론격인 기도에 관한 말씀을 마태복음 6:5-6절을 봅니다. “봉독” 기도 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였는지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기도가 하루에 세 번씩 있었습니다. 지금 이슬람교도들이 하루에 세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데 그 기도시간에 시장에 있다면 시장에 서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결국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침과 정오와 저녁에 세 번 기도를 할 때에 회당에 가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회당에서도 폼 나게 기도하고 더구나 큰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일부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곳을 기도시간에 맞추어 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참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영광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지 않게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조차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표기도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결국 사람들을 의식하기에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대표기도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자연스러운 기도가 없으니 자꾸만 외식을 해야 되니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기도만이 아니라 자선이나 금식조차 사람들 앞에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6:1-4절을 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를 행하는 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 이 땅에서 상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상에 대하여서도 사람들은 세상의 상과 같이 여깁니다. 그래서 은밀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은밀하게 행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은밀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갚으신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상을 이미 받았다는 것은 영생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7절입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합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를 기도하는 사람의 공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정성을 많이 바쳐야 기도가 상달된다는 것이 이방인의 기도방식입니다. 그래서 나온 기도방식이 무엇 무엇을 위한 며칠 기도회라는 것이 유행합니다. 그냥 기도회가 아니라 특별 새벽기도회를 만들고, 릴레이 기도를 만들고, 금식릴레이 기도회를 만듭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시위하는 기도회 같습니다. 도청이나 법원 앞에 릴레이로 1인 시위를 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교회에서의 기도도 하나님께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상 18:26절을 봅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의 기도모습입니다. 아침부터 낮 까지 안 되니 저녁까지 심지어 자신의 몸을 칼로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며 기도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기도는 단지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하여 응답될 때까지 열렬하게 기도한다는 그런 기도가 다 이방인이 구하는 모습이 됩니다.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이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가 본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을 따라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필요나 절박한 상황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는 것을 더 안전하게 확장시키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발로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는 누가 채워주시는 것입니까?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아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린 자녀가 있다면 자녀를 위하여 부모가 준비를 합니다. 겨울이 가까이 오면 아이가 구하지 않아도 겨울옷을 준비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라면 자기가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방인, 아버지가 없이 고아와 같이 버려진 자들처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아버지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늘 결핍을 느끼고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으로 부자의 관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5-17절을 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라면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 것만 관심이 있다면 아들이 아니겠지요! 아들이 아니면 자꾸만 세상의 것에 결핍을 느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족하다고 하시는 기준과 우리가 족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달라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을 보니 자기는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결핍을 느껴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합니다.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입을지를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녀라면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아버지께서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6:31-34절입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녀라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

하라고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는 의식주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 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돌보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에 대한 염려가 믿음 없는 소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고 먼저 구할 것을 구하라고 합니다.

 

먼저 구할 것이 그의 나라입니다.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도 보이는 것에 대하여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바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형태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다스림이 성도들을 통하여 보입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주에 전도여행을 다니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남산동 버스 정류소에 함께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남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취직하여 좀 잘 나갔다고 합니다. 한 10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몇 번의 부르심을 알고도 무시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르심이 마지막으로 여겨져서 약 1년간 거의 교회당에서 보내다시피 기도하고 말씀보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때 부인도 교회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1년 밖에 안 된 부인이 남편과 함께 직장도 내려놓고 그렇게 여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염려가 자녀여서 기도하였더니 이런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그 자녀도 내 것이라고 하시더랍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지 못한다는 말도 하였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입니까? 새 언약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그 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살피신 것과 같이 우리를 신실하게 보살피실 하나님의 언약의 선서에 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언약의 합의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다루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다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여도 의를 생산해 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세우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에 오히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힘써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6:1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있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연평도에서 일어나는 난리의 소식을 들을수록 더욱 그의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의란 마태복음 5:6절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가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의에 주린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로 배부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상에서 인도하신 방식대로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청원입니다. 이런 기도는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께서 다스려 달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