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3:21-25 애곡과 간구하는 소리 2010. 9. 8

 

2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었기에 전하지 않을 수는 없고, 전하니 고난이 오고, 전하지 않으려고 하니 속에서 불이 나고 그래서 다시 전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 예레미야 혼자 응답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라고 하지 않고 22절에 보시면 우리가 주께 왔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대표로 말하면서 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면서 주께 간구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를 배반하고 떠난 것이 무엇인지 보면서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 기도조차도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로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배반합니다.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확실히 나를 속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할 자들이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 우상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스라엘 온 산에 산당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결과 비옥한 산과 들이 되어야 할 약속의 땅이 벌거벗은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벌거벗은 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산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주께 기도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라고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이들이 산 위에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은 21절을 보시면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상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곡하면서 구하는 것을 보면 마치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과 같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고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몸에 칼로 상처를 내면서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으면 무언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한국의 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견학을 와서는 제일 많이 도전받고 가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철야기도, 금식기도, 수많은 크고 작은 기도원들을 보고서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강사들끼리 한국에 와서 청중들이 냉랭하면 주여! 몇 번을 외치고 기도하자고 하면 금방 뜨거워진다고 하는 말들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회에 참석을 하면 기도하는 그 순간은 무엇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돌아서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에 또 그런 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반복이 되다보니 이제 지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금요철야에서 심야기도회로 이제는 수요일 예배 후로 바꾸어갑니다. 그러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옛날에는 가난해서 부자 되기 위해서라도 부르짖었는데 이제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병 고침을 위해서 기도하였는데 병원에 가면 됩니다. 그러니 옛날에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내용들이 경제가 나아지면서 기도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견학 온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지 그 내용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런 기도회를 본받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기 위하여 산마다 고을마다 이상한 나무들만 있어도 제단을 만들고 신들에게 빌고 빌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22절을 봅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쳐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응답을 예레미야가 대표로 합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예레미야의 기도 속에 포함될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나무나 돌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신과 신상들에게서 돌아온 모습이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23절입니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합니다. 작은 산들과 큰 산에서 떠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 땅의 수많은 산들에 기도원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도심 곳곳에까지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아직도 자기의 소원을 빌어야하는 자들이 많기에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산과 큰 산에서 떠드는 일이 어떤 것입니까? 온갖 축복 대 성회를 합니다. 은사를 받기 원하는 사람, 병 고침을 원하는 사람, 사업이 안 되는 사람, 가정에 불화가 있는 사람들 다 오라고 합니다. 기도하여 능력받자고 합니다. 여름휴가도 명절도 특별 축복성회에 참석하여 기도하여 복을 받자는 것이 큰 산과 작은 산에서 떠드는 일입니다. 기도원만이 아니라 교회라고 이름 하는 곳에서도 이런 집회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돌아보시면 보일 것입니다.

 

예레미야 2:20절을 봅니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 음행한다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잿물로 씻고 많은 비누를 써도 죄악이 그대로 내 앞에 있다고 하십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다고 합니다.

 

23-25절을 봅니다.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바알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네 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달려온 길은 발정이 난 암나귀가 성욕에 못 이겨 헐떡거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바알을 사랑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고상을 떨면서 종교 행위를 하여도 발정이 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26-28절입니다. 도둑이 붙잡히면 수치를 당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 도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도둑입니다. 왜 도둑인가 하면 평소에는 나무를 향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하고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고 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환난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신들이 너희의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할 수 있으면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에 그들의 신이 그들이 성읍수와 같다고 합니다. 이들을 때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면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32-35절입니다. “봉독” 처녀가 패물을 잊겠으며 신부가 예복을 잊겠느냐고 합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어버린 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환난을 당하니 사랑을 얻으려고 그 행위를 꾸미는 것입니다. 종교행위로 꾸밉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행위를 꾸미는 것을 가지고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 옷에는 가난한 자들을 죽인 피가 묻어 있음에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죄하니 이제 진노가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심판을 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시기에 심판을 행하십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예레미야만 대답합니다. 다시 22-23절을 봅니다. 우리가 주께로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2장에서 이런 헛된 일에 대하여 보았습니다만 선지서 전체에서 이런 헛된 일이 이스라엘의 일상사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구원은 실로 우리 하나니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계속하여 24-25절입니다. 부끄러운 그것 즉 우상이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소떼와 양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다 집어 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당연함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죄 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배역한 자식아 돌아오라는 말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상 숭배가 헛된 일임을 고백하고,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이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예레미야의 이 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4:1-2절입니다. 돌아오려거든 내개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기도도 하고 종교적인 행위도 하지만 그러나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께 돌아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증한 것 즉 우상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기에 나무나 돌에다가 빌던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우상숭배입니다. 주께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3-4절에서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3절에서 묵을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묵은 땅이 어떤 곳인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압니다. 어제아래 신안의 증도라는 곳에 갔다 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90퍼센트가 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순교한 문중경 여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사가 운영하는 민박집 주변의 밭을 보았습니다. 봄에 밭을 갈고 참깨를 심었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잡초를 뽑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깨보다 잡초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묵은 밭은 이런 밭과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태어나면서부터 장착이 되어 있는 나의 우상성이 얼마나 뿌리 깊이 내린 묵은 땅인지 갈아엎으려고 하면 호미나 괭이가 튕겨 나올 지경입니다. 예레미야 1:9-10절에서 예레미야의 사역이 이렇습니다.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의 입에 주십니다. 그것으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능력도 이 말씀을 받는 자의 능력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자기는 아이라서 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예레미야를 장악하여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회개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이며 듣는 것은 사람의 말과 사람의 야망과 성공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어떤 날선 검 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혼을 찔러 벌거벗은 듯이 드러냅니다. 이것이 묵을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4절에서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합니다. 몸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마음의 가죽을 어떻게 베어낼 수가 있습니까? 마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의 가죽을 베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묵을 밭을 기경하는 것도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도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께서 이루어내셔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하였습니다.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내용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묵을 땅도 기경이 되고 마음의 가죽도 베어집니다. 이 은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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