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애가 5:19-22 주께로 돌이키소서! 2010. 9. 29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나이까 우리에게 심히 진노하셨나이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제일 어려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오는 잠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깨워놓고 기도하라고 하셔도 돌아와 보면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기도해 한다는 것도 알고 기도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 약하다는 것이 몸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해 봅시다.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제일 방해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흔히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교회에서 하는 일이나 교회를 위한 일만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믿음으로 살면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여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은 될지언정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대상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식의 신앙이라면 사람의 선택과 결심이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람의 선택과 결심으로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본 내용만 보아도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서 이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 참 하나님의 계시인줄 알고 기도를 부탁하였지만 기도의 내용이 자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짓말한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나 신앙생활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결국 인간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과 마음들이 다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장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신명기 8:17-19에서 봅니다.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소떼와 양떼나 늘어나고 은과 금이 풍성하게 될 때에 이것이 내 능력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능력도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따르면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신들은 은혜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은 신에게 얼마나 더 정성을 바쳤는가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신들이 여호와보다는 더 좋은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자기의 공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물 얻었다고 좋아하는데 그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목이 곧은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도 목이 곧은 백성임이 드러납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가나안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럴 때 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돌아오라고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매를 듭니다. 얼마나 맞았는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사야 1:2-6절입니다. “봉독”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한다고 합니다. 소도 나귀도 그 주인과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를 들고 때립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맞았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7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불렀습니다.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그들이 점점 더 멀리하고 우상들에게로 달려갑니다.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아도 그들을 고치는 줄을 모릅니다. 사랑의 줄로 이끌며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을 주었는데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시면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끝끝내 물러가고 돌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올 자가 없음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거나 회개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마치 주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중립적인 상태인데 결단과 결심만 하면 주께로 돌아올 것처럼 돌아오는 모든 가능성을 사람에게 두고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하려고 해도 사람이 거부하면 구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셔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자들이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것은 주께서 돌이켜 주셨기에 돌아오는 것이지 스스로의 결단과 결심이 아닙니다.

 

호세아 11:8-11절입니다.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이여 네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 맹렬한 진노로 나타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입니다.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십니다. 그 바탕은 긍휼입니다. 이 긍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12절에서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싸고 유다는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인간들은 무엇에 기대를 거는가 하면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신앙도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이 시대의 대세입니다. 어떤 분의 기도에 대한 내용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을 못 뵈었지만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존경하고요. 우리 어머님이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식들한테 기도를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요. 또 우리 어머님의 삶을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도 지금부터 우리 애들에게 비전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되고 안 되는 건 본인 능력에 달렸고 여건이 갖춰져야겠지만”

 

오마이 뉴스에서 따온 글입니다. 추석전날 아침마당에서 대통령이 자기 어머니 이야기 후에 부인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자기 시어머니 얼굴은 못 보았지만 자기 아들이 사장이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였기에 대한민국 최연소로 35살에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자식들한테도 시어머니의 삶을 이어받아 자기애들도 비전을 가지도록 기도한다고 합니다. 되고 안 되는 것은 본인 능력에 달렸고 여건이 갖춰져야 하겠지만 이라고 하였답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들에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기도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여 세상에서 사장도 되고 성공도 하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그런 기도와 소원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부지런히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라는 바알우상에게서 돌아오라고 불렀는데 부를수록 오히려 바알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망하여 애굽으로 잡혀갔습니다. 애굽에 잡혀 가서도 회개하라고 하니 것이 어떤 말을 합니까?

 

지난 수요일에 본 말씀 한 번 더 봅니다. 예레미야 44:15-19절입니다. “봉독” 애굽에서도 예레미야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여 애굽까지 피난 온 이슬라엘 백성들이 하는 말이 우상숭배 할 때는 평안 했는데 우상숭배를 버리니 고난이 왔다고 합니다. 므낫세 왕 때에 우상숭배를 하니 평안하였는데 요시아 왕 때에 우상 버리고 하나님 섬기고부터 나라가 더 어려워지고 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그 하늘 여왕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우상숭배로 나라가 망하여 애굽까지 피난 간 상황에서도 회개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부요가 므낫세 때와 같은 부요입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금송아지를 신으로 경배하는 물신숭배가 가득합니다. 학교든 절이든 교회이든 돈이면 다 통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상숭배 할 때에 평안하고 부자가 되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 땅의 현실입니다. 여기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리듯이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는 결국은 바벨론처럼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51:5-10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를 거역함으로 그 죄과가 땅에 가득합니다. 그 죄로 인하여 바벨론에 쳐들어와서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도 멸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벨론에서 도망하여 나오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의 멸망과 같은 말씀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함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은 자가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남은 자는 바벨론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자들은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을 예언하였고 멸망을 보았습니다. 5:1-18절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목격한 현실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면 일어나는 일들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강대국을 의지한 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범죄이며 그 죄악을 우리가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죄악을 조상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16절에 보시면 우리의 범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악수를 한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과 악수를 하고 있습니까?

 

이런 멸망을 목격하고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도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9절에서 주의 영원함을 말합니다. 주님이 영원히 계시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른다고 고백하는 것은 주의 언약이 영원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번 언약하신 내용을 영원히 기억하여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영원하신 언약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영원히 잊으시며 이같이 오래 버리시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비록 배신하여도 주님의 언약은 영원하오니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참으로 뻔뻔한 간구입니다. 범죄 하였으면 멸망하여 마땅한데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언약의 영원함을 믿기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하여도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주께서 돌이켜 주셔야만 돌아갈 수 있다고 간구합니다. 지금 형편은 우리를 아주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예레미야가 돌이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70년 만에 돌아오리라는 계시를 받았기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간구대로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그것이 주께로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온 자들은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갑니다. 내 마음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주께서 돌이켜 주소서!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그 모든 길에서 우리를 돌이켜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