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7:1~7   블레셋에 대하여     2014. 12. 3

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3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 4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5 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6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7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

지난주에 애굽이 왜 심판을 받고 미약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두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애굽의 교만입니다. 나라가 부강하여지면 이런 교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일강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바로 왕을 악어로 비유하며 그런 악어를 갈고리에 꿰어 사막에 던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애굽을 의지하던 자들도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애굽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처럼 오늘 성도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루어가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1절에 보시면 블레셋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은 한 나라이기 보다는 각 도시들의 연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이라고 하면 블레셋에 속한 여러 도시들을 다 포함합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도시들이 가사와 가드와 아스글론과 같은 도시들인데 우리가 몇 년 전 주일 오후에 사사기를 보면서 자세히 살펴본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인데 그 시기는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바로 왕이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의 심판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을 치는 나라가 애굽인지 바벨론인지 구별이 잘 안 됩니다. 1절의 배경을 보면 애굽이 가사를 치기 전이라고하기 때문에 애굽이 블레셋을 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북쪽에서 물이 일어나 친다고 합니다. 그동안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본 내용은 북쪽이란 항상 바벨론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이 북쪽의 바벨론과의 전투를 하고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가사를 친다면 애굽이 북쪽에서 오는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46:7절에서 애굽도 강물이 불어남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1절에서 애굽이 블레셋을 치는 것은 부분적인 것으로 보고 일반적으로 북쪽은 바벨론이기에 바벨론이 블레셋 사람을 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해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부분이 나올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을 하십니까? 한국 사람들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많습니다. 한국어처럼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따져 보아야 할 내용도 그저 믿습니다!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에 이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됩니다. 1절에서 7절을 보시면 블레셋 사람을 치는 나라가 애굽이든 북쪽이라고 하는 바벨론이든 그 도구보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4절과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제 그만 심판을 받으면 좋겠다고 해도 여호와께서 칼을 보내셨기에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1~4절을 봅니다. 블레셋 사람을 치기 위하여 북쪽에서 큰 강물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강물이 땅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듯이 성읍과 주민을 휩쓸고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그 땅의 주민들이 통곡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홍수처럼 군대가 몰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병거소리에 아버지들의 손이 풀려서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고 두로와 시돈에서 올 수 있는 지원군들도 멸절시킬 날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돌 섬에 살아남은 블레셋 사람들까지 주께서 멸망시키신다고 합니다. 

5~7절은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5 가사는 슬픔에 겨워 머리털을 밀고 아스글론은 말문이 막힌다. 아낙의 살아남은 자들아, 너희가 언제까지 몸에 상처를 내며 통곡하려느냐? 6 너희가 '아! 주께서 보내신 칼아, 네가 언제까지 살육을 계속하려느냐? 제발 너의 칼집으로 돌아가서 진정하고 가만히 머물러 있거라' 한다마는, 7  내가 그 칼을 보냈는데, 그 칼이 어떻게 가만히 쉬고 있겠느냐? 그 칼은 아스글론과 해변지역을 치라고 내가 보낸 것이다.” 심판의 모습을 마치 그림 그리듯이 보여줍니다. 심판을 당하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칼을 보고 언제까지 살육을 계속하겠느냐고 탄식을 하지만 주께서 그 칼을 보냈는데 어떻게 가만히 쉬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도 열심히 이루어내시지만 그 심판도 열심히 이루어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 대하여 심판의 말씀만 있습니다. 왜 심판을 받는지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이런 저런 죄로 인하여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특별한 죄를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하신다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블레셋 사람들이 무엇을 잘 못했다는 것입니까? 제가 참고하는 주석이 박동현씨의 예레미야 주석입니다. 이 사람은 독일에서 예레미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본문의 결론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온 누리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나라에도 또 다른 나라를 시켜 재난이 닥치게 하시기도 한다.”

왜 블레셋이 이렇게 철저하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라면 이 말씀에 아멘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른 심판의 이유도 없이 나를 심판하여 오시는데도 아멘으로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작은 억울한 일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조그마한 자존심 상하는 일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식식대면서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 없이 나라가 망하고 사업이 망하고 자기 가족이 심판을 받고 자기 자신까지 심판을 받는데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 못했다고 이렇게 나를 가만히 두시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를 제발 그대로 내 버려두시기 바랍니다. 별 수 없는 인간을 왜 이렇게 갈구십니까? 이러한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러한 수많은 탄식들이 시편과 욥기에서 나옵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이든지 아니면 지금 억울하다고 여기시는 분이시라면 왜 이런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0:6~20절을 보시면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들이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이 당시의 사람 이름이 곧 지역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노아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 왜 저주를 받은 자가 나오는 것입니까? 주일 오전 산상수훈 설교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한 말씀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 중에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함이 아비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고 조롱함으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후손들이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이미 선악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시기에 진멸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기에 방주를 예비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면 노아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로만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계시는 이미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따라 이 역사 속에서 펼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일방적인 긍휼과 사랑이 아니면 모두가 진노와 진멸의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과연 아멘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미 선악과를 물고 태어난 인생들은 자기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상과 벌을 계산하는 자들입니다.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만큼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않았다고 악악거립니다. 그런데 아무른 이유도 없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고 친히 심판을 집행하시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악체계와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택한 자들이 믿게 되는 것도 결국 자신의 선악체계와 인과율이 다 깨어지는 아픈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로마서 1:18~23절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인생들이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25:1~14절입니다. “봉독” 예레미야 선지자가 요시야 왕 때부터 23년간 여호와의 말씀으로 꾸준히 일렀지만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끊임없이 보냈지만 순종하지 아니하였고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자신을 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의하여 심판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의 심판의 때가 다 되면 그 바벨론마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5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이 심판의 대상 안에 블레셋도 포함이 됩니다. 

아모스 1:6~8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7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기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나옵니다. 그 죄란 노예무역을 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바다와 육지를 오가면서 약탈하는 민족인데 사람들까지 잡아다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스가랴 9:1~7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2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오늘 본문 4절에서도 두로와 시돈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보다 훨씬 후대인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된 스가랴서에서도 두로와 블레셋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두로가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고 은을 티끌 같이 금을 진흙같이 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고 바다에 처 넣어버리신다고 합니다. 두로나 시돈이나 블레셋이 다 바다를 끼고 성장한 민족들입니다. 두로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이 아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블레셋 도시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에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심으로 블레셋의 교만을 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피를 그 잇사이에서 가증한 것을 제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모스에서 보았듯이 이들이 사람들을 팔아먹은 자들이기에 사나운 짐승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은 이러한 블레셋도 남은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돌아온 자들은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을 것이며 여부스 사람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부스 사람이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다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된 부족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란 아담의 후손으로 심판받아 마땅한 사실만이 아니라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모르는 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종의 종들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셈족의 후예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에 가장 괴롭힌 민족가운데 한 민족이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약탈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곡식이나 가축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잡아다 팔아넘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하나님을 이러한 블레셋을 심판하시면서도 그 중에 교만을 꺾어내시면서 구원할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소망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대로 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심판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 교만을 꺾으시고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것처럼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블레셋 사람과 같은 모습의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내가 아무른 심판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온갖 징계가 다 임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항의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블레셋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다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구원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하여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구약의 선지서를 통하여 우리의 실상이 어떠한지가 들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중동에 일어나고 있는 저 블레셋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블레셋이 팔레스타인입니다. 우리가 번역한 성경에서 블레셋이라고 하는 이름이 팔레스타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혈통적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기에 성경을 문자대로 보고서 팔레스타인을 진멸해야 할 나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약의 스가랴서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자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5:7~11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이후로는 어떠한 인종과 민족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이미 약 2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미 확정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같은 이방인인 우리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이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