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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1~5:27 생각하여 보라   2016. 1. 27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오늘 본문에 대한 설교제목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설교는 논문처럼 색인이나 각주를 달수가 없습니다. 물론 필요할 때는 출처를 밝히기도 하지만 설교가 논문 발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성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이 본문 제목 첫째는 도덕질서가 전부다’. 둘째는 친절한 친구의 쓸모없는 설교’, 셋째는 편견과 교만으로부터 나온 충고입니다. 이 제목은 차례대로 박영선 목사와 크리스토퍼 에쉬와 오스왈드 챔버스입니다. 저는 7절의 엘리바스의 말로 생각하여 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 4:1절을 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의 말에 제일 먼저 대답을 합니다. 엘리바스가 가장 연장자인 모양입니다. 욥의 재앙을 보고 일주일을 말을 하지 못한 채 있다가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엘리바스 같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겸손하게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의 탄식과 원망소리를 듣고서는 자신의 모든 지혜와 경험으로 욥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이 우리가 평소에 너무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말들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무엇이 틀렸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2~5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봅니다. “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3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4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5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엘리바스의 충고를 짜증스러워하지 말고 잘 들어보고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욥 너도 전에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힘없는 자들을 상담하고 위로해 주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일들이 네가 닥치니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낙담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4:6~7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고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재앙이 갑자기 닥쳤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죄 없이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고 묻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끊어지는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하고 끊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갑자기 중도에 망하고 끊어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갑자기 이런 재앙이 닥친 것은 분명히 죄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엘리바스가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에 우리가 반박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무수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온갖 저주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재앙이 일어나면 우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아봅니다. 자기에게 별 원인이 없다면 조상들에게서도 찾아봅니다. 나중에는 신에게서 찾아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성의 바탕입니다. 그래서 조상을 잘 섬겨드려야 한다거나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도 이러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 자신을 보거나 욥을 보거나 간에 자신이 그동안 경험해 온 지식에 의하면 욥에게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무슨 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보편타당한 생각입니까! 어느 누구도 여기에 반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이런 생각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안에 다 장착되어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이 바로 사탄이 하나님께 말한 내용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자랑하실 때에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셨기에 욥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복을 거두어가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산과 자녀가 다 날아가고, 몸까지 전신에 병이 들고, 아내는 욕하고 사라졌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을 공격하는 말이 사탄이 하나님께 한 말과 논리가 같습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말이 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엘리바스의 말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을 얼마나 잘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거의 다 인과율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성경에서도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이지만 이 세상에서 심어야 거두는 것이 마땅한 원리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원리를 넘어서야만 볼 수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에 대하여서는 이 원리를 넘어서야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여 이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이 바로 사탄이 하나님께 한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생각이 곧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욥기서는 이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욥의 논쟁이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유 없이 이런 고난이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욥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욥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재앙이 왔다고 하는 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런 죄를 지은 적도 없기에 이런 재앙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욥의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계속하여 생각하여 보라고 합니다.

 

4:8~11절입니다.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인과응보적인 발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에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린 자는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자로 비유하여 말합니다. 사자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이런 사자도 사냥한 것이 없이 새끼는 흩어지는 것으로 인과응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로 위로삼아 힘없는 자들이 버텨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심판을 받지 않으면 저 세상에서라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로 위안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방편일 뿐입니다. 이러한 위로는 미련한 자들의 위로와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서 26:7절과 9절입니다.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언(箴言)이란 교훈이 되고 경계가 되는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의 위로와 교훈이라는 것은 저는 자의 다리가 힘없이 달린 것과 같다고 합니다. 장애인이 들으면 기분 나쁜 표현이지만 소아마비가 온 사람의 다리는 아무른 힘이 없이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잠언이라는 것이 아무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련한 자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가시나무를 들고 설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상담이 옵니다. 주로 교회를 소개하여 달라는 내용이 많지만 어떤 상담들은 자기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한마디 하면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로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안 되고 상처만 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4:12~21절입니다.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엘리바스가 자기의 지혜와 경험으로 욥에게 대답을 합니다. 욥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인과율과 자신의 경험과 지혜로 논증을 합니다. 이러한 논증을 하면서 가장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이 신의 계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들은 음성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에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이러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밝히시고 또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엘리바스는 신의 계시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세상의 경험과 지혜보다 한 수 위의 세계를 체험한 것으로 다시 논증을 합니다.

 

어떤 형상이 다가오는데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는데 그 형상이 조용한 중에 자기에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어떤 인간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고 합니다. 참으로 합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으로 부리시는 천사도 미련하다 하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고 합니다. 하루 사인에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장막의 줄을 뽑으면 그대로 폭삭 무너지는 것이 장막입니다. 우리의 인생들이 실로 이러합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말을 엘리바스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함으로 더 이상 논박하지 못하게 합니다.

 

5:1~7절입니다.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엘리바스가 욥에게 계속하여 말을 합니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네가 주장하는 그런 말에 응답할 어떤 신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인과율을 말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분노와 질투 때문에 죽어간다고 합니다. 지금 욥의 분노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의 뿌리가 뽑히고 그 집이 순식간에 망하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 모든 재산들이 다른 굶주린 자들이 다 차지한다는 말을 자기 경험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욥이 지금 당하고 있습니다. 위로가 아니라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습니다.

 

5:8절입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앞에서 본 오스왈드 챔버스의 제목이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편견과 교만으로부터 나온 충고입니다. 엘리바스가 아무리 지혜가 많고 경험이 많고 초월자에 대한 체험까지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편견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위로와 충고와 조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이 최고의 진리라고 여기기에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내 일을 의탁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떤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저 들어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은 사람이라면 기도해 봐! 하나님이 응답하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이것이 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있어서 그런 말을 합니다.

 

5:9~16절입니다.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엘리바스가 아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표현들이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비슷한 구절들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신다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의 손에서 가난한 자를 건지신다는 말씀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임의로 재편집하여 사용하면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고 듣는다는 것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입니다.

 

5:17~21절입니다.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이 단락과 비슷한 말씀을 찾아봅니다.

 

히브리서 12:5~8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바스가 징계가 복이라고 한 것과 히브리서의 말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에리바스는 욥의 징계가 죄로 인하여 온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죄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에 징계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잘 못하였기에 징계가 오기도 합니다만 징계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징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율법적인 기준을 제시하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습니까? 엘리바스처럼 말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들이기에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근실하게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6:1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엘리바스의 말 중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논리는 누구의 논리와 같습니까? 앞에서 본 천상회의에게 사탄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은 이런 말에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속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 원인을 알려주고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성공하는 비결, 복 받는 비결,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과율적인 도덕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노릇을 하게 됩니다.

 

5:22~27절입니다.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 단을 제 때에 들어 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욥의 발언에 대하여 엘리바스가 첫 번째로 답한 내용의 결론은 나라면 너처럼 고집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비록 징계를 하셨지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면 들의 돌이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장막의 평안함을 얻고 아무리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자손이 많아지고 장수하다가 무덤에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도 하나님과의 언약이 제대로 이행이 되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 2:18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되는 상태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늘 바람을 피우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신실함으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돌이켜 주심으로 이런 평안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님께 의탁하라는 조건을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엘리바스는 이 말을 자기의 지혜와 경험과 초월자의 계시까지 동원하여 말한 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다고 합니다. 여기의 우리는 엘리바스와 함께 온 친구들이 포함되지만 욥도 고난당하기 전에는 우리속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나니 엘리바스의 말에 수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말에 쉽게 수긍을 했다면 욥기서는 5장 정도로 끝나도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쟁이 길어지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이론과 생각들이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들이 쉽지가 않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 정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해석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라고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었다고 하는데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든지, 다른 곳에 마음을 두려고 합니다. 때로는 금욕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합니다. 금식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하면 나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설교를 많이 들었기에 교회 일을 과도하게 해 보기도 합니다. 선교단체에 소속이 되었다면 선교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쏟아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 속에는 엘리바스의 말이 들어있습니다.

 

지금도 이런 고민에 있는 분들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생각을 해보라는 말은 인과응보로 풀어내려고 생각을 해 보라고 합니다. 세상이 죄 없이 망하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을 욥에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욥이 고집과 오만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왜 하는지 인과율에 붙들려 있는 것인지 정말 그 사랑에 매인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는 공격과 방어가 계속됩니다. 물론 욥을 공격하는 자들은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답을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답이 없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죄 없이 저주 받아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믿는 것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알 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바스와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공격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들을 받을 때에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지 알고 믿게 되는 자가 인과율을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긍휼이 임한 자들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도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