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스가랴 7:1-6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 2010. 11. 10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스가랴서는 3년 전 수요일 저녁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와 관련하여 스가랴서의 몇 곳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5월의 금식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왕궁이 불타고 귀인들의 집들조차 파괴된 날을 기억하면서 5월에 금식한 것입니다. 7월의 금식은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된 예루살렘에 그달랴를 세워서 그 남은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지만 다시 반역이 일어나 그달랴를 죽이고 유다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이 두 날을 기억하며 금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70년이 되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금식하여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5월에 금식하며 기도하였기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돌아왔는데도 5월에 하던 금식을 계속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벧엘에서 온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인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5월에 해 왔던 금식과 근신을 계속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근신이라는 말을 전의 성경에서는 재계(齋戒)라고 하였습니다. 재계(齋戒)란 오락을 금하고 울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목욕재계한다는 말을 하지요! 그런 금식을 계속하느냐 마느냐고 묻습니다.

 

4-5절입니다. 여호와의 응답이 스가랴 선지자에 임합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였지만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합니다. 아주 강조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한번만 나를 위한 것이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금식이 순전히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가장 강력한 종교적이 행위입니다. 그냥 기도하기보다 금식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서 나라가 망한 날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것도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고 다시 시온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금식하면서 기도한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회개하고 시온으로 돌아가고자 금식하며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시편 78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여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계속하여 반역하고, 여전히 범죄하고, 거듭 거듭 거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부를 죽이시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도합니다.

 

시편 78:34-37절입니다. “34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6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죽이실 때에 그들이 기도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첨이며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위기를 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고 언약에 성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이제 간절히 기도하였겠지요! 나라가 망하고 집이 불타고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 끌려가면서 회개하지 아니할 백성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악하였던 므낫세 왕도 바벨론에 끌려갈 때에 회개하였습니다.

 

역대하 33:10-13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므낫세도 자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금식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도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즐거운 절기 때에 기뻐하며 잔치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에서도 먹고 마십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다 자기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늘 먹고 마십니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당연한 것으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이렇게 기도하면서 먹어도 사실은 말로만 그렇지 순전히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금식한다고 해도 나를 위하여 하는 것에서 달라질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때로 금식도 철야도 새벽기도도 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예수님을 부르고 섬김으로 내가 잘 되고 천국도 가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내가 신에게 부르짖는 것은 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받아내어 나의 확장을 꾀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삼들 생각은 어떤 생각이겠습니까? 수능시험지 인쇄가 다 되었을 것인데 그것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재수생이 시험지 훔치려고 들어가다가 잡혔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훔쳐 나오려는 노력이라도 하는데 기도한다는 사람들은 기도로 때우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는 수능 특별기도회를 하고 목사가 수험생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준다고 합니다. 점수만 오른다면 금식인들 못하겠습니까? 절에도 마찬가지로 수능 백일기도회를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금식입니까?

 

이사야 58:1-9절을 봅니다. “봉독” 금식하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데 왜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금식하는 날에 무엇을 합니까? 오락을 구하고 종들을 학대하며 일군을 압제합니다. 형식은 금식의 표를 다 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이전의 선지자로 다 말씀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입니다. 종교적인 행위 중에 금식이 가장 대단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마저 자기를 위한, 자기의 소원 성취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금식과 고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평소에 하는 짓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약자들을 학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금식이란 밥을 굶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8-10절입니다. “봉독” 진실한 재판을 하라고 합니다.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고 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을 해하려고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행하지 아니한 금식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로 돌아왔다면 좀 고쳐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도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형식적인 금식은 하지만 참된 금식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14절입니다. “봉독”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그들의 마음을 금강석같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유리위에 먹으로 글을 쓰면 어떻게 됩니까? 물로 씻으면 바로 지워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금강석처럼 되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진노하셔서 열국에 흩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땅은 인애와 긍휼이 흘러야 되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긍휼로 베풀어 주셨기에 그들이 노력하지 아니한 약속의 땅을 받아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약자를 오히려 학대하고 착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의 땅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돌아와서는 달라졌습니까? 여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공정한 재판과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참된 금식을 하십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여 내십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이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 다 이루심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제야 제대로 된 회개가 나옵니다. 그 회개가 스가랴서 12:10-13:1절을 봅니다. “봉독” 그를 찌른 자들이 그를 보면서 애곡하게 됩니다. 이것이 애통과 간구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며 이런 자들에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어야 자기가 행한 일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사렛 이단의 괴수 예수를 적법하게 처단하였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들이 찔러 죽인 메시아라고 회개를 하겠습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하늘 보좌에 등극하셔서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니 비로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1-37절을 봅니다. “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성령이 임하고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장면을 기록하면서 그 뼈가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출애굽기 12:46절의 유월절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말씀과 시편 34:20절의 그 뼈가 보호되어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한 스가랴 12: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증거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37절을 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처음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찌른바 나를 보고서 애통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심령이 찔린 것입니다. 심령에 찔려서 회개하는 자들이 바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란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회개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무엇으로 애통하는가 하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한스러워서 통곡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통해 하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장본인임을 알고서 마음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애통하는 것입니까?

 

10-11절입니다. 자기 외아들, 독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통곡하는 것입니다. 므깃도 골짜기 하다르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요시아 왕이 전사한 곳이기에 백성들이 애통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압니다. 무너져 내리는 유대를 온 힘을 다해 개혁한 그런 왕이 죽었을 때에 이제 유대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운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운 것입니다. 이 정도의 애통, 이 보다 더한 애통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여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