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6:9-15 이렇게 기도하라 2010. 11. 3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방인의 기도란 아버지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삶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의 실상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끝없는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기도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 내용들은 현재 자신이 있는 것에서 출발을 하기에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과 절박한 현실에서 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는 것들은 결국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한다는 것은 기도의 출발점을 내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을 합니다. 내가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로 여기기에 현재 있는 내가 더욱 나아진 내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간구는 늘 보이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은 결국 겉 사람의 필요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쇠하여 갑니다.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가 있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만 한다고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약의 실패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만 주시고 우리에게 맡겨두시면 주기도문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외웠느냐는 식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셔야 하시는 것도 이 기도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첫 번째로 볼 내용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기도를 받으실 분에 대한 호칭입니다. 먼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땅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것만 보고 살았습니다. 거저 하늘이라는 것도 어떤 조물주가 있어서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잘 돌보아 달라는 그런 하늘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생각하여도 결국은 땅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은 위엣 것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것이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가 구할 내용입니다. 위에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이 말씀만 제대로 묵상을 하며 기도를 하여도 우리가 더 나아지기를 원하고, 더 있기를 원하고, 실로 답답하고 절박한 문제들이 산적하여 있다고 하여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며 지나가는 것인데 우리가 땅의 문제들로만 얽매어 있었다는 것을 하늘에 계신이라는 이 한마디 속에서 다 녹아질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단지 단어만 기억한다고 될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주의 성령께서 이 약속의 말씀 안에 우리를 사로잡히게 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결코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 아래서 태어났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습니다. 율법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습니다.

 

출애굽기 4:22절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말씀을 알고 있기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 임금과 백성, 남편과 아내, 목자와 양등의 관계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언약의 관계를 깨어버리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사야 1:2-4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분명이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불러내셨지만 그들은 아들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호세아 11:1-2절입니다.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아들로 불러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아들의 자격이 없는 자임이 구약에서 다 들어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만드시기 위하여 불러내신 일은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13-15절입니다.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가게 된 것을 마태는 호세아 11:1절 말씀의 성취로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아들 만들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가 그들의 아비 였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유명한 아버지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아버지와 내 아버지를 구별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너희의 하나님은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독단적인 예수님을 어떻게 용납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유대인이 이러하다면 이방인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2:1-2절을 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즉 마귀의 자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큰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 다른 자녀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7-40절입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을 아들이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7:21-22절입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속에 자기 백성을 넣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갈라디아서 4:4-7절을 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고백이 아들의 영으로 인하여 나오는 사람만이 제대로 기도가 되는 사람입니다.

 

한곳만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8:14-17절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됩니다. 놀라운 권세와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게 되는데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왜 부르짖는 것입니까? 고난을 통하여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영이 임한 자는 아빠 아버지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18-30절을 보시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어떤 탄식할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31-39). 그러므로 환난과 핍박이 가중되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이 간구가 나오는 자라면 아들입니다.